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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워킹맘, 2020 워킹대드


옛날 옛적 회사에는 워킹맘들이 있었다.(당연히 지금도 워킹맘은 있다.)

2020년 코로나 시기, 재택근무 기간을 핑계 삼아 워킹대드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워킹맘들은 살림을 뒷전으로 사회적 성공과 자아실현을 목표로 한 무책임한 엄마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잦은 집안의 사건 사고와 아이 성적의 하락은 모두 엄마가 일하는 '탓'이었다. 엄마의 사회생활 '덕'으로 가정 경제가 윤택해짐은 물론, 일하는 엄마의 사회적 성공이 사회에 기여하는 ‘공(功)’은 교묘하게 감추어졌고, 육아의 '과(過)’를 과장하여 워킹맘을 사회적 논쟁거리로 만들었다.

 

워킹대드들은 워라밸을 챙기며 사회적 성공을 뒤로한 야망없는 패배자, 여가형 직장인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아빠의 육아는 지인과 가족들에겐 칭찬의 대상이지만, 육아의 시간과 회사 업무의 균형을 잡는 데 시간을 들이는 워킹대드에게는 반드시 ‘굳이’와 ‘유난스럽다’는 꼬리표가 달린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워킹맘들의 사회생활 참여는 지금은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워킹대드들의 육아는 여전히 선택사항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육아는 돕는 것이 아니라 같이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회사 생활하는 워킹대드들에게 육아는 아직 사치로 받아들여진다.

아빠 육아의 필요성과 아빠 육아의 사치성. 워킹대드라면 매 순간 고민의 연속이다.



워킹맘들의 사회생활은 이런 선입견들과 싸워왔다. 집안일을 병행하느라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주어진 일 외에는 소극적이며, 일과 시간 외의 야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조직 중심의 단결력이 부족하며, 임신하면 기껏 일 가르쳐두니 출산으로 그만둔다는 악의적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의되었었다.


워킹대드들의 사회생활은 작은 기회를 두고 벌이는 회사 내 땅따먹기에서 불리한 자리로 내몰렸다. 가급적 저녁 회식보다는 점심 회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를 통한 상사와 임원과의 유대감은 그 자리를 자주 하는 동료에 비해 뒤쳐질 수밖에 없다. 상사와 골프도 치고, 술도 함께 마시고, 담배도 함께 피우는 동료보다 승진과 평가에서 우위에 점할 방법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라인과 정치보다 실적과 성과로 증명해 보이고자 정해진 시간 내에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아이가 자고 있는 조기출근을 적극 활용한다. 일을 잘 마무리하면 아이와의 겨우 2시간 남짓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워킹맘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편견과도 크게 싸워왔다. 일하는 엄마를 가진 인식?¿ 낙인?¿ 뭐 아무튼 뭔가가 생기면, 아이의 학교 준비물이 미비되거나 학교에서 사소한 문제만 발생해도 교사는 알림장에 엄마의 ‘일’을 언급하며 아이에게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덧붙였었다. 엄마들 간의 동업자 의식은 더욱 부족했다. ‘그 집 엄마는 일하니까’라는 말은 본 적도 없는 엄마들의 입에 내 자식 이름 올리기 딱 좋은 관용구였다. 사소한 아이의 실수가 엄마의 탓으로 침소봉대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다.

자연스럽게 학부모들 간의 정보 불균형은 권력이 되고, 인지와 몰인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무차별 폭력을 가해진다. 워킹맘과 그의 자녀들에게…


워킹대드는 어머니에게도, 장모님에게도 아이를 의탁하기도 눈치 보인다. 해당 부탁은 워킹맘인 아내의 탓으로 귀결되며 워킹대드는 ‘육아한답시고 아내 욕 먹이는 놈’이 된다. 결국 이모님을 쓰거나 종일반을 사용해야 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아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아내는 뭐하고’와 ‘일도 잘 못하면서’가 뒤섞인 성공을 뒷전으로 미룬 ‘적당히 하는 워라밸찾는 직장인’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새벽에 아이가 아파 응급실을 둘러업고 달린 엄마와 아빠. 입원 당일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은 누구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빠가 병원에 있겠다고 말할 때마다 묘한 선입견이 누적된다. 특히 보직자라면 상급자가 임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설명은 구구절절한데 설득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사소한 것들 속에서 배려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는 주니어들에 비해 시니어는 기존의 방식의 회사원 마지막 세대로 인식되어 케어는 없고 마지막 조리돌림만 남아있다.


그나마 워킹맘들에게 드리워진 안타까운 연민의 시선마저도 워킹 대드들에게는 사치이다.

아빠 육아는 여전히 선택의 영역이고, 온전히 그걸 선택한 아빠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워킹대드의 길을 가는 것은 극심한 몸싸움만큼이나 고단하고 피로한 일이다.

그들이 바란 건 오직 하나, 아이의 성장에 유의미하게 기여하고 싶다는 이 짧은 소망을 실천하는 것.

그 짧은 소망이 가져오는 의외로 큰 스트레스에 고민의 깊이만큼 한숨의 길이도 길다.

 


'아빠 학습법, 아빠 책 읽기, 거꾸로 보는 아빠교육, 아이의 미래는 아빠가 결정한다.' 등 ‘아빠에 의한 아이 미래 결정론'은  비트코인 우상향 차트분석 그래프만큼 맹목적으로 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돈을 버는 남편/아빠로서의 역할은 기본으로 가사와 육아에(돕는 것이 아닌) 참여하는 것을 기본 덕목으로 확대되었다. 워킹맘들의 등장이 자발적이었다면, 워킹대드의 출몰은, 몇 년 전  출판계를 휩쓴 아빠의 교육 참여가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는 교육 트렌드로 인한 강제성 탓도 없지 않다.


아빠의 육아는 지인과 가족들의 칭찬과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아빠에게 default는 육아가 아닌 돈벌이라는 선입견에서 자유롭기도 쉽지 않다. 하루의 절반, 인생의 1/3 이상을 바쳐온 회사라는 전쟁터에서 경쟁에서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조바심 들고, 내가 가는 워킹대드의 길이 맞는지 자꾸 뒤돌아보게  될 수밖에 없다.  


워킹맘보다 워킹대드의 통념과 싸우는 일은 인식과 공감대도 부족하고, 사회적 지원과 동업자 같은 연대도 약하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수많은 정책들은 만들어지고 있지만, 워킹대드들이 우선적으로 제도를 실 이용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그나마 그 많은 제도들을 이용할 수 있는 기업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워킹대드의 길을 시작하기 좋은 여건이었을지 모른다.


유리천장과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겨내고 30년 남짓의 세월을 인고해내, 자리를 잡은 워킹맘들의 그 꽃길을 따라 워킹대드들도 따를 수 있을까.

워킹대드의 일과 육아,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일이냐 육아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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