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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제대로 노는 법

아들과 깐부 먹은 아빠

아이와의 놀이는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는 것이다.


육아와 집안일을 돕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것이듯 아이와의 놀이 역시 그렇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아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이던, 아빠가 피곤한지 아닌지는 아이가 고려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1인칭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것들 투성이인 아이들에게 타자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상이 본인이 마음 놓고 뛰어놀 품인 아빠의 품이라면, 아빠는 '탐구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휴식과 놀이'의 대상이다.



8살이 된 아들의 키는 나의 60%, 체중은 확실히 만만찮아서 나의 30%.

하루 권장 열량은 1,800kcal로 나의 55%에 달한다.

물론 아빠의 실제 섭취량은 권장량의 1.5배 될 테지만... 어느새 아빠의 2/3의 에너지를 갖고 몰아붙인다. 아이가 사내아이이거나 힘이 넘쳐난다면 아빠가 감당해야 하는 에너지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단 한 번의 지침과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 피곤을 인지하는 신경계가 마비된 것처럼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건 뭔가 열량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와 노는 것은 42.195km 마라톤을 하는 중간중간 100m 달리기 하는 것과 같다. 2시간 넘는 시간을 견뎌낼 스태미나가 필요한 것은 물론, 폭발적인 에너지와 텐션으로 무장한 아이의 에너지를 꾸준하게 소비해내야 한다.

중장거리와 단거리 미션이 뒤섞인 이 프로젝트를  퇴근 후  버스/지하철에 시달리면서 돌아온 워킹대드가 완벽하게 소화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의 놀이에 꼼수는 없다. 나의 피곤을 이겨낼 정신력과 2시간을 버텨낼 평소에 다져놓은 체력만이 살 길이다. 먹기 위해 운동한다는 어느 연예인의 말처럼, 평소에 체력을 길러두는 수밖에 없다. 침대나 소파에 등을 대는 건 아이가 잠이 든 이후에나 할 수 있는 행위다. 가혹하지만, 그것이 워킹대드의 숙명이다. 내가 아이와 함께 놀지 않는다면 결국 아이는 다른 양육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워킹대드라는 이름이 화려한 왕관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빠'라는 이름은 왕관의 무게를 견뎌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도 같다.

뭐 다른 양육자에게 양육하거나 아이 혼자 노는 법을 키워줄 수 있다면 그 선택도 존중한다.



일단 아이와 함께 놀이를 시작했다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애처럼 굴고 떼쓰고 싸우란 말이 아니다. (종종 아들과 툭탁거려서 '둘 다 말 예쁘게 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아이와의 놀이의 순간만은 그 놀이에 푹 빠져서 놀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놀이의 순간에 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자.

"아빠. 핸드폰 보지 마. 핸드폰 금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내 말 듣고 있어?"


나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거 아닌데?"

"핸드폰 보고 있어도 네 말 다 들었어."

"피곤해. 다른 거하자. (몸 안 쓰고 편하게 하는 놀이나 놀이를 빙자한 공부를 강요하기도 한다.)"


아빠들은 놀이에서도 관찰자이거나 감시자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위계와 연차에 민감하고, 조직생활을 하면서 체계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런 성향은 더 두드러진다. 나 역시 그랬다. 끊임없이 지시하고, 뭘 할 건지 미리 말하라고 하고, 조금이라도 규칙에서 벗어나면 이의를 제기한다. 아이는 반복되는 아빠의 훈계에 흥을 내기도 전에 놀고 싶은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린다.


어쭙잖은 훈계와 사회적 규율을 접어두고, 외부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아이가 원하는 놀이의 규칙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과 놀이 방법이 제대로 작동했을 때 느끼는 희열은, 아이의 밝은 미소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소하지만, 이런 리액션을 섞어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오오 좋은 방법 인대? 아빠도 몰랐던 규칙을 만들었네. 다음에 아빠랑 또 이 방법으로 놀이하자."

작은 호응에도, 아이는 아빠의 합리적 동의에 자신감이 샘솟는다. 이런 호응은 놀이 초반에 아이를 북돋아 이후 진행되는 과정을 순탄하게 만들어준다.


아이가 만든 규칙을 너무 타이트하게 지키려는 생각도 버리는 것이 좋다. 아이는 계속해서 새로운 규칙과 방식이 떠오를 것이고, 조정한 규칙을 최대한 준수하는 선에서 수용하고 좋은 방법이라면 응원해주면 된다. 물론 더 나은 방식이 있거나, 조율해보려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비록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그런 놀이의 과정을 통해 아이가 사회화를 경험하고 성장하는 것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감식안은 우리의 기대처럼 허술하지 않다. 놀이에 집중하지 않는 아빠를 아이는 대번 알아본다.

꼼수도 통하지 않는다. 감기는 눈꺼풀을 못 이겨 잠깐 감은 눈에 '아빠!' 하는 괴성이 날아온다.

일단 놀이에 뛰어들었다면 어른의 잣대로 훈계하거나, 어쭙잖게 가르치는 말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지금은 놀이의 시간이고, 정신없이 뛰 도는 아이의 시간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충분히 놀았을 때 아이는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고,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정확한 이론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지친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고 난 다음 날 아이가 아빠에게 더 달라붙고 사랑을 표현한 경험은 누구가 갖고 있을 것이다.


6개월의 육아휴직기간 동안 아들과 후회 없이 놀고 난 이후에, 자기 전 한참을 뒤척여야 잠들던 아들은 편안하게 잠이 들기 시작했다. 야근이 많았던 한 주가 끝난 주말, 아이가 정말 원했던 세븐틴 노래에 맞춰 춤추기와 배게 싸움을 3 시간 했더니 온 몸은 녹초가 되었고, 무릎은 시큰거렸다. 하지만 놀이가 끝나자마자 아들과 매트에 누워 10분 간 정신없이 웃기만 했다.


웃으면서 아이와는 딱 말만 되뇌었다.


"정말 재밌었다. 그렇지?"


아이와의 놀이 DNA는 있는 것도 같다.

어린 시절 친구와 노는 것보다 내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더 소중했을 MBTI I형 아빠라면 내게 아이와의 몸놀이할 DNA 따위는 없는 것 같아 너무 큰 다름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자.

'아이의 제안에 맞춰 기꺼이 함께 놀 최소한의 체력과 진심만 있다면, 아이는 분명 알아줄 것이다.


놀이로 하나 된 우린 깐부 아닌가.

2021년 아들과 깐부 먹게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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