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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화수 Feb 10. 2019

그 겨울에는 농구대잔치가 있었다

여전히 놀고 싶은 불혹커_2

추운 겨울 새벽,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실 실내체육관 앞에 줄을 섰었다. 겨울 스포츠의 꽃, ‘농구대잔치’ 일명 점보시리즈를 직관하게 위해서였다. 두근거리는 맘으로 체육관에 들어서면 그 열기와 함성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낯설겠지만 당시에는 실업팀과 대학팀, 군대 농구가 한 코트에서 경합을 벌였다. 실업팀은 기아와 현대, 그리고 삼성, 대학팀은 연세대와 고려대, 중앙대와 경희대 그리고 군 복무 중인 선수들로 구성된 상무가 격돌했다.


그 시절, 농구대잔치의 황태자는 단연 '농구 천재' 허재였다.  각 팀들이 허재를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었다. 허재는 드리블, 패스, 슛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게임 전체를 리드하면서 매 경기마다 엄청난 득점을 올렸다. 83년 점보시리즈를 시작으로 96년까지 통산 득점 2위, 어시스트 1위, 3점 슛 1위, 리바운드 3위, 스틸 1위 등 전 부문 최상위 랭커였다. 기록만으로도 말 다했다.


허재의 왼손 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허재와 손발을 맞추던 기아의 플레이어는 일명 '허동택 트리오'라고 불리던 강동희와 김유택, 그리고 한기범이었다. 넓은 시야로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던 가드 강동희와 골밑을 책임지던 센터 양대산맥 김유택과 한기범의 조합은 가히 난공불락이었다.


넓은 시야와 빠른 돌파의 강동희, 높은 신장과 뛰어난 기량의 김유택, 큰 키와 강한 힘 만큼 비주얼도 위협적이었던 한기범


강력했던 기아가 늘 경기를 지배했던 건 아니다. 기아를 흔드는 막강한 플레이어들이 상대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허재가 황태자였다면, 황제는 따로 있었다. 일명 '슛도사'라고 불리던 현대의 이충희가 바로 그다. 뛰어난 탄력으로 리바운드에서도 밀리지 않았고, 돌파는 전광석화 같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위치에서도 감각적인 슛으로 골을 완성시켰다. 특히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내리 꽂히는 3점 슛이 일품이었고, 국내에서 가장 먼저 통산 3000점과 4000점을 돌파한 명실상부 득점기계였다. 팀이 좀 더 받쳐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이충희에 필적할 만 하지만, 2% 부족했던 플레이어로 삼성에 김현준이 있었다. '전자슈터'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현준은 거의 직선에 가까운 외곽슛과 골밑 언저리에서는 그냥 막 던지는 것 같아도 다 들어가는 뱅크슛(백보드를 맞춰서 넣는 슛)이 일품이었다. 김현준은 이충희가 은퇴한 뒤 국내 첫 5000점을 돌파한 선수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김현준은 지난  199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농구의 양대산맥이라 부를만 한 이충희와 김현준


이들은 농구선수로서 참으로 멋지고 훌륭했지만, 농구대잔치의 인기를 폭발적으로 키운 건 다름 아닌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선수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어머어마한 '오빠부대'를 몰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연세대 돌풍의 출발점엔 문경은이 있었다. ‘람보 슈터'로 불리며 이충희-김현준의 계보를 잇는 3점 슈터로 인기를 구가했다. 경기의 흐름은 영리한 '컴퓨터 가드' 이상민이 조율했다. 날카로운 패스와 영리한 플레이, 때론 과감한 돌파로 경기의 흐름을 한 번에 바꿔버렸다. 외곽에는 '오빠부대'의 대명사 우지원이 있었다. 잘생긴 외모와 날카로운 3점 슛으로 여성팬들을 매료시켰다. 이들이 자유롭게 플레이를 할 수 있었던 건 골밑에 '골리앗' 서장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장훈은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갖췄다는 평을 들었고, 골밑 슛과 리바운드뿐 아니라 야투와 외곽슛도 수준급이었다. 서장훈을 막기 위해서는 반칙밖에 없었다.(그래서 서장훈은 선수생활 내내 부상을 달고 다녔다)


서장훈이 입학한 연세대는 비로소 날개를 달았고 역대 최초로 농구대잔치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기록은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을 모두 보유했었던 중앙대도 이루지 못했던 기록이었다.


연세대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이들 때문에 체육관 앞에서 기다리는 줄이 많이 길었다. 위로부터 문경은과 이상민, 우지원과 서장훈


고려대에도 연세대에 필적한만한 멋진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인기에 있어서는 연세대에 못미쳤...)


연세대에 서장훈이 있었다면, 고려대에는 전희철이 있었다. 물론 서장훈의 압도적인 피지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서장훈이 갖지 못했던 빠른 스피드와 깔끔한 골밑 플레이가 일품이었다. 특히 자유투 라인 언저리에서 높은 타점으로 던지는 페이드어웨이 슛(뒤로 점프하면서 던지는 슛)이 매우 정확했다. 흐름은 가드 김병철이 맡았다. 빠른 스피드와 투지 넘치는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이상민이 영리했다면 김병철은 뚝심이 있었다. 연세대가 문경은과 우지원의 쌍포를 앞세워 외곽을 장악한데 비해 상대적으로 고대의 3점 슈터는 빈약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희승은 시원한 3점 슛으로 경기의 흐름을 바꿨다. 뭐랄까 끈끈한 플레이랄까. 양희승한테는 그런 게 있었다. 고대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건 바로 '슈퍼루키' 현주엽을 영입한 후부터였다. 득점보다는 유연성과 탄력을 겸비한 리바운드가 좋았고 파이팅면에서는 서장훈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고대의 플레이는 끈질기면서도 역동적이었다. 선수들의 개인기가 뛰어났고 승리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쉽게 내주는 경기가 없었다.


 

역시 고대의 플레이는 투지가 넘쳤다. 남겨진 사진들만 봐도 그렇다. 위로부터 전희철과 김병철, 양희승과 현주엽

 

연세대와 고려대는 플레이 스타일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는데, 연세대가 각자의 포지션에 특화되어 고도로 전문화된 '분업' 플레이를 했다면 고려대는 선수 개인의 기량과 플레이를 중심으로 한 '올라운드' 플레이를 선호했다. 연세대 최희암 감독과 고려대 박한 감독의 작전 때문인데, 최희암 감독은 외곽슈터가 3점 슛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오면 불 같이 화를 냈고, 박한 감독은 별다른 작전지시도 없었다고...


뭔가 생김새에서도 작전을 지시하는 스타일이 느껴지는 두 감독이다. 연세대 최희암 감독과 고려대 박한 감독


전적으로 내 기억과 경험을 따라 쓴 글이어서 객관적인 사실이나 평가와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이들만큼 훌륭했던 선수들이 많지만 일일이 기억해 모두 써 내려가지 못한 점은 살짝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와 같이 그 시절 농구대잔치를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이 글을 통해 열광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텅 빈 농구코트를 보면 피가 끓고, 심장이 뛴다. 바쁜 일상에 지치고 몸은 무거워져서 발목이 시큰거리고 손가락 마디가 저려도, “농구는 밤에!”를 외치며 금요일 밤이 되면 조명이 켜진 농구코트로 모여드는 친구들이 여전히 있는 건, 열정 어렸던 이 시절을 함께 기억하는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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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나이 40이면 '불혹(不惑)'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라고 합니다.  막상 40이 되어보니, 이 말의 뜻을 다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정신을 빼앗길 세상일 투성이고, 판단을 흐리게 할 일은 켜켜이 쌓여만 갑니다. 그래서 공자 선생께서 40을 불혹이라고 지칭했나 봅니다. "40이 되면 미혹이 많을 테니 정신을 바짝 차리게..." 그런 뜻으로...

브런치 매거진 '여전히 놀고 싶은 불혹커'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저의 단상입니다. 미혹되지 않는 나이 40이 아닌 여전히 놀고 싶은 나이 40의 일상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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