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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Feb 25. 2024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자,「헌치백」

나는 종종 게을러진다. 위험을 감수하기 싫고 비판을 받고 싶지 않고 말실수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를 받아들여지는 안전한 곳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그런 감각이 온통 나를 지배하고 있는 걸 깨닫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너무 좁고 작아진 느낌이 든다.


소설 「헌치백」을 읽었다. 책 뒤에 적힌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이야기는 종종 총으로 비유되곤 하는데 발포와 총알이 그려지는 직선적인 방향성 때문에 그렇다. 헌치백은 총으로 비유하자면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총열이 폭발하는 샷건 같은 이야기다. 그룹홈에 사는 중증 장애인이며 트위터 계정으로 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주인공 샤카가 간병인과 겪는 단 하나의 사건이 그려져 있다.


장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거나 말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비장애인이고 그들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니까. 장애는 당사자에 따라 천차만별인 데다 설사 똑같은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이 있더라도 각각이 가진 환경, 인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정확한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감수성과 인권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있어도 장애에 관한 어떤 특정한 말은 완전히 무지한 말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고 누구에겐 모욕이 될 거다. 한 마디로 장애에 관해 말하는 누구라도 비난을 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대화를 나눌 때는 더 껄끄러워지기도 한다.


대학 시절 내가 다닌 학과는 산의 경사면에 위치한 학교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을 사용했다. 물론 도로로 접근은 가능했지만 급한 경사면이었고 차가 오래 정차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종종 한 학생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보행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이었고 어머니와 함께 등교했다. 택시를 이용했고 어머니가 그를 업어서 강의실까지 데려갔다. 그와 같은 수업을 듣지는 않아서 어머니가 같이 수업을 듣는지 밖에서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이 끝나서도 어머니 등에 업혀 귀가했다.


당시 나는 과의 웹진 동아리에 속해있었고 한 달에 한 번 기사를 썼다. 그 학생과 관련한 취재를 해보고 싶어 학교에 위치한 장애학생지원센터에 찾아갔다. (그런 센터가 있다는 것도 정보를 찾다 알게 되었다.) 당시 지원센터의 선생님께서 내 취지를 듣고 장애학생 몇 명에게 관련된 내용을 전달해 주기로 했다. 내가 위에 설명한 학생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선생님은 대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채셨다. 그분에게도 이야기를 전달해 보겠다고 하셨다.


며칠 후, 센터에서 연락이 왔는데 시각 장애를 가진 두 명의 학생이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동행하는 학생은 정중히 거절했다고 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관심에는 감사하나 나는 조용히 학교를 다니고 싶을 뿐이다'라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각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는 만나 점심을 먹었고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성적이 좋았을 뿐 아니라 해외 유학을 준비 중이었고 속도가 조금 느리긴 하나 점자 텍스트를 이용해 충분한 학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환경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누차 강조했던 것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장애와 관련된 무언가를 대표하는데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들 덕분에 장애가 가진 개별성에 대한 이해를 조금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헌치백」의 주인공은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장애인 여성이 할 수 있는 임신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어떠한가? 간병인에게 거액을 주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달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아래 종이책을 증오하는 화자의 문장을 인용해 본다.

책 때문에 고통받는 꼽추 괴물의 모습 따위, 일본의 비장애인은 상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종이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서서히 등뼈가 찌부러지는 것만 같은데도, '종이 냄새가 좋다,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좋다'라는 등의 말씀을 하시면서 전자서적을 깎아내리는 비장애인은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중략) '출판계는 비장애인 우월주의(마치스모)예요'라고 나는 포럼에 글을 올렸다.
- 46p, 「헌치백」

습관적으로 종이책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 문장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그러나 화자가 말하는 내용은 그가 가진 장애를 포함하여 그를 통합된 한 명의 인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읽는 내내 불편했고 글로 발화하기도 어려운 이런 내용을 굳이 이야기해야 하는 건 그래서이다. 사회에서 가장 쉽게 지워지고 표백되는 건 그런 불편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장애 문제에 관해 말하기는 껄끄럽지만 반대로 연예인의 불륜/이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불화 같은 영역에서는 얼마나 안전한 영역에서 쉽게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것인지.


인간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것에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나도 종종 게을러진다. 위험을 감수하기 싫고 비판을 받고 싶지 않고 말실수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를 받아들여지는 안전한 곳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그런 감각이 온통 나를 지배하고 있는 걸 깨닫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너무 좁고 작아진 느낌이 든다.


헌치백(hunchback)이 척추 장애인을 뜻한다는 것은 책을 다 읽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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