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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l 31. 2019

다른 데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법

59. 영화 <안경>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한 명의 에디터가 쓴 리뷰와, 여러 에디터가 함께 나눈 대화가 각각 업로드됩니다.

*7월의 주제는 [여행]입니다.


*7월 주제 [여행] 일정표

1.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3), 리들리 스콧

2. 책 『대도시의 사랑법』(2019), 박상영

3. 영화 〈안경〉(2007), 오기가미 나오코

4. 책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2019), 박막례, 김유라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일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이 많이 지치고 소진 되었다고 느껴질 때, 그저 다 내려 놓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그치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막상 떠나려 하면 어디로 갈지 모를 때도 많고, 어렵게 여행에 가서는 평소보다 더 빡빡한 스케줄로 관광지를 돌다가 공허해질 때도 많다. 여행도 취향이나 목적에 따라서 그 의미와 방식들이 많이 달라지겠지만 만일 쉼을 위한 여행이라면, 그 여행에서 제대로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대로 쉬고 충전하는 일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카모메 식당>을 시작으로 슬로우 라이프 무비 장르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안경>은 어렴풋이 그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고 있다.


<안경> 2007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어느 곳으로든 떠나고 싶었다는 타에고는 그 조건에 알맞은 마을을 찾은 듯 하다. 한적하다 못해 너무나 적막한 바닷가 마을에서 들리는 소리랄 것은 그리 거세지 않은 맑은 파도 소리가 전부이다. 조용한 곳에서의 홀로 쉼이 필요해 보이는 타에고는 그렇게 마을에서의 여행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뭔가 이 마을,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사실 타에고가 도착하기 전, 심상치 않은 다른 인물도 이 마을에 도착한다. 민박집 주인 유지와 민박 손님도 아니며 계속 방문하는 선생님 하루나는 동시에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그 인물을 맞는다. 바닷가 모래 사장에 놓인 가게 문을 열어 두고 그 인물을 맞는다. 사실 그는 1년에 한 번 이곳에 방문해 빙수가게를 여는 사쿠라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타에고가 맞은 다음날 아침, 타에고 옆엔 말도 없이 찾아 와 부담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사쿠라가 있다. 웃는 얼굴로 좋은 아침 보내라며 의문의 인물은 사라진다. 그리곤 바다 모래사장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알 수 없는 체조를 열심히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인 것 같기도 하고 특이한 의식인 것 같기도 하다. 타에고는 처음 보는 생경한 풍경에 낯설고 이질적인 심정을 느낀다. 이 민박집 무언가 이상한 것 같은데 싶은 표정을 하며 타에고는 체조에 참여하지 않는다.


왠지 여기가 맞는지 불안해지는 기분이 들 때 거기서 조금만 더 참고 가서 우회전 하라는 간결하고 특이한 약도처럼, 이 곳에선 명료한 설명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다. 대체 왜 아침마다 사쿠라는 조용히 들어와서 잠을 깨우는지, 아침마다 다들 모여서 하고 있는 정체모를 체조는 무엇인지, 민박집 운영은 어떻게 유지 되는 건지. 의문 투성이다.


그럼에도 아침마다 매실 장아찌는 매일 시큼하고, 매실은 하루의 화를 면해준다는 말을 하는 일상은 반복된다. 심심하다 못해 지루해지기 딱인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기서 멈출까 싶을 때 5분을 더 보면 영화의 속도는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낯선 감정으로 얼어 있는 것 같았던 타에고의 마음도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다만 잠시 그 민박집을 떠났다 돌아온 후 부터 말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관객과 비슷한 시선으로 낯설게 사람들을 대하던 타에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른 민박집을 알아봐야 겠다고 한다. 그렇게 도착했던 다른 민박집에선, 모두가 뜨거운 볕 아래에서 밭을 매고 있다. 민박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하루 일당량에 맞는 일을 하고, 그 결과물로 먹는 밥이 꿀맛이라고 밝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하루치 생산량을 채워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타에고는 놀라 도망치듯 나와 다시 길을 돌아간다. 매일의 일을 하고 그 결과물로 얻는 밥도 맛있고 뿌듯하기야 하겠지만, 타에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뿌듯함이 아니었다.


돌아온 타에고는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민박집의 일상에 익숙해진다. 빙수도 늘 사양하고 사색보단 관광지는 없냐고 묻던 타에고는 이제 민박집 사람들에게 적응해간다. 생산적인 일이랄 건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서 천천히 사색의 의미를, 빙수의 맛을 알아간다. 그리곤 누구보다 씩씩하게 바다 체조를 하는 변화한 그녀. 그제야 비로소 타에고의 여행은 정말로 시작된다. 충분히 쉬고 충분히 사색한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매년 사쿠라의 빙수 가게가 문을 열 시즌에 맞추어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


타에고의 속도에 맞추어 이 마을에 어느샌가 익숙해진 나는 사쿠라를 중심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긴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요즈음 천천히 명상을 배우고 있는데 선생님이 하는 말들이 사쿠라가 하는 말들과 통했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된다고 이야기하던 사쿠라의 말들엔 군더더기가 없다. 쓸데 없는 말을 하기 보단 마음 속에서 걸러내고 걸러낸 진짜 중요한 말들을 한 마디씩 하는 것 같다. 게다가 심심하고 지루하단 생각으로 영화를 보다 포기하거나 넘겨 보았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차분함이 긴 시간 명상을 한 후의 기분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사실 우리의 수많은 생각은 미래 아니면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로 나를 데려 오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을 뿐더러 매 순간을 그렇게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에 오롯이 존재하기 위해선 자꾸만 뻗는 복잡한 생각들을 뒤로 하고 단순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는 모래사장 위 체조처럼, 한 번 죽으면 두 번은 안 죽을 거라는 말처럼, 적정하고 맛있는 팥을 위해 조용히 팥이 끓는 것을 보는 것처럼, 불안해지는 지점으로부터 조금 더 참아 보는 것처럼.


온전한 쉼과 충전을 위해선 그에 대한 강박조차 버려야 한다는 것, 아마도 타에고는 바다를 바라보며 빙수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런 단순한 생각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어쩌면 누군가는 명상을 하면서 흩어지는 생각들을 다시 잡아 오고, 누군가는 기도를 드릴 것이고, 누군가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단순해지는 지 알고, 그런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다면 '이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싶은 생각의 빈도가 조금은 줄어 들고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지구같은 거 없어져 버렸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어요. 여기 오기 전까진. 무엇이 있는 걸까요? 여기 바다엔.
- 글쎄요.
아무 것도 없어서 좋을런지도.
- 뭔가 바라는 것이 있나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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