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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l 31. 2019

우리, 조금만 느려져볼까요

59-1. 영화 <안경>을 보고 나눈 이야기

*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 이 녹취는 여행 키워드의 세 번째 텍스트인 영화 <안경>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 이번 모임엔 일벌레, 다희, 연연, 이주가 참여했습니다.


* 본 녹취록은 '다른 데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법’을 읽으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neuvilbooks/333




일상 밖, 환상의 속도로


다희: 영화 <카모메 식당> 을 통해 오기가미 나오키 감독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카모메 식당>을 좋게 봐서 차기작인 <안경>을 선택했어요. 2007년 개봉작인데도 촌스럽지 않더라고요. 영화의 속도가 느려서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제가 요즘 배우고 있는 명상과 맞닿는 지점이 많아서 좋았어요. 보통 '여기'가 아닌 곳으로 여행을 떠남으로써 다시 '여기'로 돌아왔을 때 버틸 수 있는 힘을 얻고 돌아오는데, <안경>은 떠남 없이 지금 여기서 버티는 방법을 보여주는 거 같았거든요.


이주: 언젠가부터는 잔잔한 영화를 즐겨보지 않게되어서 끝까지 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좀만 더 봐야지' 하면서 보다 보니 어느새 끝나있더라고요. 그래서 걱정보다는 잘 보았어요. 다 보고 나니 영화 속 공간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졌어요.


다희: 저는 이 공간 자체가 너무 판타지 같아서, 오히려 저길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이건 영화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이주: 맞아요. 메르시 체조가 너무 판타지 같았어요. 특히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다른 장면에서는 별로 안 나오다가 체조할 때에만 잔뜩 나타나는 점 같은 부분에서요. 실제 영화 촬영지가 어디인지 아나요?


다희: 오키나와 남쪽 섬이라고 하더라고요.


일벌레: 저는 예전에 잡지에서 봤던 무인도 여행이 떠올랐어요. 일부러 사람이 없는 섬으로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아보는 여행이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찾아보니 단체로 모여서 가는 여행 상품으로 변질되었더라고요. 정글의 법칙 같은 체험물처럼요. 무인도 여행도 상품화되는 요즘이니, 더더욱  <안경> 같은 여행을 찾는 사람도 많을 것 같아요.


연연: 저는 슬로우 티비가 생각났어요. 유럽에서 시작된 채널인데, 바닷가의 파도치는 모습이나 난로의 모닥불 같이 아주 작고 잔잔한 변화만 일어나는 풍경만 보여준대요. 사회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 슬로우 티비를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 시청률이 생각보다 높게 나왔대요.


다희: 비슷하네요. 저는 오래 전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유행하는 브이로그와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여행지에서의 긴 브이로그처럼 특별한 사건 없이 잔잔하게 여행지에서의 하루들을 보여주고.


연연: 영화 전반적으로 그래요. 학교 선생님이 지각했는데 '원래 그런데요 뭘' 하고 말잖아요. 그 때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태평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출처: 네이버영화 <안경>



작은 성취와 작은 쉼


이주: 저는 '하마다' 말고 하나 더 있는 숙소 '마린 팰리스'가 흥미로웠어요. 육체적인 노동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한편에 있다는 거잖아요. (녹취자 주: 타에고가 처음 선택한 숙소 '하마다'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사색하는 공간인 반면, '마린 팰리스'는 오전에 농사를 짓고 오후에 관련 수업을 듣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들에겐 그게 쉼인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발제문 해석이 마음에 들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관객과 비슷한 시선으로 낯설게 사람들을 대하던 타에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른 민박집을 알아봐야 겠다고 한다. 그렇게 도착했던 다른 민박집에선, 모두가 뜨거운 볕 아래에서 밭을 매고 있다. 민박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하루 일당량에 맞는 일을 하고, 그 결과물로 먹는 밥이 꿀맛이라고 밝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하루치 생산량을 채워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타에고는 놀라 도망치듯 나와 다시 길을 돌아간다. 매일의 일을 하고 그 결과물로 얻는 밥도 맛있고 뿌듯하기야 하겠지만, 타에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뿌듯함이 아니었다."

_다희 발제문 '다른 데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법' 중에서


다희: '마린 팰리스'를 통해 열심히 일해서 생산하는 여행을 보여줌으로써 하마다의 쉼이 갖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느 걸 선택하냐는 성향의 차이일 것 같기도 하고.


이주: 맞아요. 마라톤을 취미로 열심히 하는 분에게 왜 하냐고 물어봤더니, 마라톤에서만은 노력에 비례하는 성과가 숫자로 찍히기 때문이라고 말하더라고요. 학생때까지만해도 성적이라는 확실한 성과지표가 있지만, 직장에서는 내 노력만으로 성과가 나오기 힘드니까요.


연연: 공감되네요. 모델 한혜진이 TV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몸이야말로 인풋 아웃풋이 비례하는 유일한 대상 같다고. 직장인이 구몬을 하는 것도 비슷한 거 같아요. 작은 성취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하루에 몇 장씩 푸는 학습지를 하는 거 아닐까요?


일벌레: 저도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번 인풋 아웃풋, 특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경험해보면 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제가 남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고..하는 이야기를 듣더니 저는 운동에 빠지기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사람 성향이 맞는 것 같아요(웃음).



영화 속 미스터리: 남자와 안경


이주: 인물들의 사연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그냥 끝나더라고요. 그게 이 영화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다희: 따라 온 남학생 있잖아요. 그 남자는 대체 누구며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어요. 타에고가 그 남자가 왔을 때부터 미묘하게 밝아지고 태도가 달라지잖아요.


일벌레: 낯선 곳에 혼자였다가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와서 나와 함께 있다는 면에서 조금 더 마음이 열린 거 아닐까요.


이주: 그리고 남학생은 이곳에 오자마자 엄청 적응을 잘 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색도 하고 낚시도 하면서요. 타에고가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 아닐까요.



다희: 영화 제목이 '안경'이잖아요. 그 의미가 나오지는 않지만 모든 인물이 안경을 쓰고 있더라고요. 마지막 장면에 타에고가 자신의 안경이 날아가는 걸 보고 그냥 웃고 넘기잖아요. 그걸 '하마다' 주인이 낚고요. 영화에서 안경이 어떤 걸 의미할까 궁금하더라고요.


일벌레: 영화 전반에서 주목되지 않는 존재인 안경을 내세움으로써 해석에서 빗겨나려고 한 거 아닐까요.


연연: 타에고가 자다 깨서 생경한 인물(사쿠라)이 있음을 깨닫고 허겁지겁 안경을 쓰는 모습 등을 보면서 안경이 날선 시각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 안경이 날아가고, 그걸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타에고의 모습을 통해 타에고의 변화를 보여준다고요.



슬로우라이프는 계속될 수 있을까?


이주: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사쿠라처럼 타에고도 '하마다'로 매년 봄에 돌아온다고 느꼈어요. 다들 이곳을 매번 찾고 싶게되는 이유가 뭘까요.


다희:  '하마다'를 바깥과 단절된 시공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아요. 사회적 기준이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곳?


연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상징적인 말이 나오잖아요. 타에고가 '하마다'로 온 이유, "휴대폰이 안 터지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요.


다희: 사쿠라가 강조하는 사색이 뭘까 생각했어요. 바다 보고, 빙수 먹고... 과거나 미래 없이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는 행위가 아닐까... 그래서 사색이 현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일벌레: 저는 대도시로부터의 단절이라고 생각했어요. 타에고가 쉴 만큼 쉬었다 했을 즈음 관광하려고 했을 때 다들 의문을 가지잖아요. '하마다'에서는 사회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속도, 형태의 삶이 이상한 게 되는 거죠.


이주: 그래도 확실한 벌이가 있어야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더라고요. '하마다'에서의 태도를 현실에서도 새기자는 메시지는 알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여행에서만 가능해요. 그런데 여행 가기 위해선 다시 쫓기면서 일을 해야하죠.


다희: 맞아요. 생각해보니 영화 속 인물 모두 다들 본업이 있네요. 그래서 여유가 있는 건가...


이주: 돈을 받지 않고 팥빙수를 팔 수 있는 여유(웃음). 어쨌거나 여유라는 게 요즘의 트렌드이긴 하잖아요. 쫓고 쫓기는 팍팍한 삶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라는 논의가 많이 생겨나고 있고, 그렇다고 무작정 쉬는 건 답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고요. 두 가지 삶이 공존해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좋겠어요.


다희: 일본이 우리보다 10년 더 빠르다고 하잖아요. 일본에서 <카모메 식당>이 개봉하면서 슬로우라이프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아류작도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선택지를 고려하기 시작한 거 아닐까 생각해요.



연연: 슬로우라이프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민재: 슬로우라이프를 팔아야죠(...).


다희: 당장 슬로우라이프를 살 수 없더라도 개개인이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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