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가 다 부러지고 이런 사건 사고는 없었겠지만 마음이 살짝 허전하다거나 그런 이슈는 없었어?"
평소 말장난을 치고 싶을 때 꼬치꼬치 묻는 나의 말버릇과 그걸 들어주는 내 남자 친구와의 대화다.
휴일에도 바쁜 스케줄 때문에 꽤 오래 데이트를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나의 속뜻은 바빠서 못 보지만 너에게서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 였다. 하지만 녀석.. 밥도 잘도 잘 먹고 허전함 없이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었구나..허허 무탈했다니 참 다행이구나.
아니 근데 잠깐만, 데이트를 할법했던 공휴일은 커녕 일주일이 넘도록 한번을 못 봤는데 남자친구 입장에서
이렇게 평안해도 되는거야? 설령 안 보고 싶었어도 말이라도 좀 과장해서 애정을 표현해주면 안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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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어서 광광 발을 차던 때도 있었다. 싸움의 패턴은 나는 지금 너에게서 80%정도의 사랑 표현을 원하는데 기대치보다 저조한 너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안든다와 같은 것이고 사랑이 식었다거나 너가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멘트들이 종종 등장했다.
오랜 싸움 끝에 알았다. 그와 나는 사랑에 대한 정의도, 표현법도 다르다는 것을.
남자친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온도는 36.5도 라고 했다. 그는 사랑을 평소 온도처럼 익숙함과 안정감의 의미로 정의했다. 차가워져선 안되지만 과장되게 꾸미거나 너무 뜨거워 서로의 일상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그에게 뜨거움이란 이런거다. 서로가 너무 바쁜 일정임에도 사랑을 앞세워 시간이 늦었고 자시고간에 어떻게든 데이트를 한 후, 다음날 지친 상태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것은 삶의 균형감을 잃게하며 그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거다. 그러므로 36.5도처럼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야말로 좋은 관계가 아니겠냐는 거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온도는 38-40도쯤 됐던 것 같다. 만약 내 마음에 검색창이 있다면 사랑을 쳤을 때 연관 검색어로는 열정, 화려한 퍼포먼스, 뜨거움과 같은 것들이 따라왔을 거다. 그러니 애정 표현에 있어서도 보고 싶어 죽겠다, 당장 달려가겠다와 같은 열정을 동반한 표현은 당연한 것이요, 늦은 시간 핑계 대지 않고 만남을 성사시키는 노력이야말로 참 사랑이 아니겠냐 하는 거다. 그런 뜨거움이 없는 그에게 나는 혼자 실망하며 전쟁의 서막을 열어갔다.
그럼 내 남자 친구는 사랑꾼이 아닌 것인가? 그렇진 않다. 그는 정말 단 한 번도 나에게 차갑게 군적이 없으며 절대 나를 구속하거나 귀찮게 하는 일도 없었다. 내가 냉온탕을 수시로 드나들 때도 그는 정말 한결같이 내 옆에서 동일한 강도(?)로 날 사랑했다. 사실 이 얼마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는 큰 사랑인가. 몸에는 해로우나 맛이 좋은 단짠 맵짠 조미료를 듬뿍 쳐주길 원하던 나였지만 담백한 건강식과 같은 사랑을 추구하는 내 남자친구의 연애관을 이해하고 부터는 그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한다고 한순간에 태평성대가 열리진 않는다. 늘 평소 기온을 유지하는 그의 사랑은 내가 차가워졌을 땐 따뜻하게 느껴지지만 내가 뜨거워졌을 땐 다소 미지근하게 느껴져 마음은 서운하다는 거다. 이것은 이성의 통제가 느슨해지는 피곤함과 맞물리면 곧장 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그와 나의 차이를 머.리.로.는 인정하면서 나의 장단에 맞출 것을 계속 강요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결국 내가 변해야 해결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언제 사랑받는다고 느끼는지 그에게 설명할 순 있지만 그가 항상 그걸 맞춰줘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나의 틀에 맞추려 했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비난하거나 방치하며 상대를 괴롭혔다. 왜 나는 나에게 맞춰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 문득 내가 얼마나 그에게 사랑을 핑계 삼아 폭력을 휘둘렀는지 깨닫게 됐다. 연인이기 때문에 모든 게 허용될 거란 무서운 착각. 그게 내 눈을 잠시 멀게 했던 것 같다.
20살에 만나 8년째 연애 중인 우리는 현재는 이런 싸움 대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내 입맛대로 맞추고 싶은 충동이 문뜩 올라올 때마다 잠시 한 발자국 떨어져 내 태도를 검열하는 노력 역시 지속하고 있다. 또한 그는 나의 취향을 기꺼이 존중해주어 가끔 소소한 이벤트로 조금 더 스페셜한 상황을 연출해주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너무 한결같이 잘해줘서 내가 무뎌진 것이라는데 그 또한 백번 공감한다)
우리는 정말 다르다.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바꾸려는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우리는 점점 더 닮아가고 더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맞추려는 그 '의지' 하나가 설렘보단 편안함이 익숙한 오랜 연인 에게는 그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된다. 내가 그 사람에게 맞출 때, 또 그 사람이 나에게 맞춰줄 때 우리가 서로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더불어 나는 이 연애를 통해 허접했던 인격이 다듬어지고 정말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우린 싸워도 평생 사이좋게 잘 살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