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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N Feb 07. 2024

무엇이 공든 탑인가? 바뀌어가는 '노력'의 기준

'쌓아올리기'에서 '덜어내기'로의 패러다임 전환

최근 한 초등학교 문제를 두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소소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에 대한 문제로, 다음 두 돌탑 중 무엇이 '공든 탑'인지 찾는 문제이다. 한 번 살펴보자.

나는 이걸 처음 보자마자 굉장히 회사 면접 문제 스타일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개인의 가치관과 인식을 녹여내기 아주 좋은, 잘 만든 열린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답이 딱 정해져 있는 초등학교 문제집에 올라와 준 덕분에, 나는 면접 답변에서나 주절거릴 법한 뻔한 얘기를 하나의 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기성 세대의 가치와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가치 사이의 충돌이라는 그럴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


일단, 출제자의 의도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중학교 이상의 교육과정을 밟아온 독자들이라면 당연히 출제자가 의도한 답은 (1)이라는 걸 알 것이다. 왜냐하면 공든 탑⇒무너지랴로 직렬 연결되는 것이 이 사회의 유서깊은 밈이고,  봐도 무너지지 않을 탑은 (1)번이니까.


그러나 (2)번 탑에 노력과 정성이 덜 들어갔는가를 고민해보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아니 누가 봐도 (1)보다 (2)를 세우는게 더 힘들 것 같은데? 솔직히 돌 무더기로 가져와서 무지성으로 쌓는거보다 저렇게 하나하나 균형 맞춰가면서 쌓는게 훨씬 힘들고 시간 많이 들어가는거 아님?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그것도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내가 보아도 '요즘 시대'에서 훨씬 공든 탑으로 느껴지는 탑은 (2) 번이다.


아니 요즘 시대고 나발이고 그냥 (2)가 물리적으로 더 힘든건데 무슨 시대 타령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중요한 전제 하나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뭐냐면 바로 이거다.

돌은 어디 조상신이 구해다주냐?


우리는 공든 탑을 짓는다고 이야기할 때, 탑을 올리는 그 행위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탑을 짓는 일에는 돌을 준비하는 일, 평평한 토대를 찾는 일, 돌을 쌓아올릴 인력을 모집하고 유지하는 일, 그곳에 돌탑을 지을 사회적 권리를 획득하고 양해를 구하는 일 등등의 아주 많은 자질구레한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며, 그것들이 다 탑을 짓는 과정 속 공들임의 일부이다.


돌이 지천에 널려있는 산기슭이나 해안가라면 당연히 (1)보다 (2)가 어렵겠지만, 무슨 현대백화점 지하 1층 명품관 내에서 진행하는 미션이라면 오히려 (1)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거기엔 짱돌 자체가 별로 없으니까. 즉, '요즘 시대에서'라는 말은 '돌의 수급과 제반 여건 구축이 비교적 용이한 상황에서'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공들임', 즉 '노력'의 정의 자체가 점차 변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성 세대의 노력이라는 게 돌을 많이 모아서 가장 높고 튼튼하게 쌓아올리는 것이었다면, 현 세대의 노력이란 불필요한 것을 성찰하고 가능한 많이 덜어내어 위태롭더라도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흔히 베이비 붐 세대, 디지털 전환기 세대 등으로 불리며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왔다. 그러다보니 옛날과 지금의 삶의 지향점 자체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다.(MZ랍시고 엉성하게 묶여있는 10대~40대는 사실 두 세개의 아예 다른 세대의 모임인데, 그 세대들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가 전환기의 기준점에 서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누구는 PC통신, 누구는 스마트폰, 누구는 AI..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그 전과 후는 완전히 달라졌고 자신이 그 변화의 중심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무래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겪어왔던 세대는 '쌓아올리기'를 찬양하는 세대였다. 이 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을 안 뺏기고 모으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공부라는 것은 다양하고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기억하는 일이었고, 도서관에 가며, 문제집을 사며, 각각의 낱개 정보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내 지식으로 쌓아올리는 것이 곧 공부였다.

잘 만든 만화라는 것은 '원피스'처럼 인물 하나 하나의 서사가 질릴만큼 쌓이고, 약했던 주인공이 사건들을 겪어가며 기술을 쌓아가는 그런 것이었다. 음악 역시도 개개인의 훌륭한 악기 연주 실력과 작사 작곡 능력들이 모여서 하나의 앙상블을 쌓아나가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삶 속에서 한정되어 있는 부와 명예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고 잘 모으고 불려서 안정된 탑을 일구어내는 과정이었다. (인구가 유독 많았고, 한정된 파이를 뺏기지 않는 것이 최우선인 시대였다.) 즉, 열심히 돌을 모으고 그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이제는 '덜어내기'를 통해 수많은 타자가 아닌 고유한 나 자신이 되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정보나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안 구하고 싶어도 지 맘대로 쏟아지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요즘 자기계발서는 쓸데 없는 것을 덜어내고 단순하게 살기를 강조하는 듯

이제는 직접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거나, 문제를 하나 하나 풀어보지 않아도, 똑똑한 AI들이 물어보면 대답해주고 수학 문제도 풀어준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세계 최상위권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매일 무료로 풀고 있기도 하다. 다만, 정보가 많은 만큼 이상한 소리도 많고, 얼마만큼이 정말로 신뢰할만한 소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잘 걸러듣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것이 현 시대의 공부다.

요즈음의 잘 팔리는 만화는 '원펀맨' 이나 이세계물 같은 도파민 뿜뿜하는 먼치킨 서사인 것 같다. 이제 캐릭터 한명 한명의 실패하는 모습이나 슬픈 성장과정 같은 내용들에 피로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많고, 그러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승리의 쾌감에 집중한 만화나 웹소설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음악 역시 이제는 가상 악기가 꽤나 발전해서, 클릭 몇 번으로 실제 연주자에 준하거나 때로는 더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저지 클럽' 등과 같이 오히려 세션을 덜어내고 심플하게 가거나 '하이퍼팝'처럼 음악의 원형을 깨고 안정감을 과감하게 내던지는 음악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플레이타임도 이제 3분도 길다는 분위기다. 1분이 안되는 숏폼이 주도하는 생태계 속에서, 그 짧은 노래 중에서도 더 짧은 정수만 덜어내어 전시하는 것이 필수적이게 되었다.

요즘의 노력이란 어쩌면 자신의 열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가장 아픈 딱 하나의 부위만을 찾아내는 과정에 가깝다. 나머지 손가락은 눈물을 흘리며 잘라내는거고.


즉, 요즘 시대는 돌들을 구하기 어렵지 않은 시대이긴 하다. 따라서 (1)과 같은 돌탑을 쌓는 일은 돌 자체를 모으기 어려웠던 지난 시절에 비해 월등히 쉬워진 것은 맞다. 어른들은 이를 보고 예전보다 훨씬 살기 쉬워졌는데 엄살을 부린다고 이야기하겠지만, 그들은 (1)같은 탑을 아무리 만들어봤자 이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예전에는 지금만큼은 모든 것이 몰리지 않았다. 동네에서 다섯 번째로 빵을 잘 만들면, 동네 빵집 중 다섯 번째 수준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네에서 두 번째로 빵을 잘 만들어도 옆 동네에서 빵을 제일 잘 파는 집이 우리 동네 빵 매출의 80% 가져간다. 정보가 모조리 열려있는 지금의 사회 속에서는 사람들의 시선과 욕망을 얼마만큼 가져올 수 있느냐가 곧 생존가능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안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1)의 돌탑을 버리고, 굳이 굳이 위태로운 (2)의 돌탑을 쌓아야만 한다. 지으면서 몇 번을 무너지고 실패하더라도 나만 쌓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비록 속이 텅 비어있거나 불안정하더라도 고유한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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