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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Apr 21. 2024

관찰과 현상이 따로 노는 면역학적 시대의 비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directed by 하마구치 류스케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화관에는 개봉예정작 홍보를 위한 전단이나 포스터, 배너 등이 매일 택배로 온다. 하루는 내가 일하는 영화관으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선전재료가 배송되었다. 도착한 택배 상자에는 굵은 글씨로 영화의 제목, 그리고 그 아래 다른 글씨로 ‘지랄’이라고 적혀있었다. 물류 과정 중 누군가가 제목에 반감을 품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듯하다. 이 사건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 신작과도 상당이 조응한다. 우선 ‘지랄’이라는 이 반대표는 많은 이들이 처음 제목을 듣고 느꼈던 의문의 감정을 대변한다. 한편 그 방법이 욕설과 손괴라는 일종의 ‘악행’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주장과 부딪힌다. 또한 영화 속 마을 회장의 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처럼, 물류라는 흐름 속 상류에서 일어난 일이 결국 여과 없이 하류에 도달한 셈이다. 일상의 사소함이 영화의 외연을 확장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영화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 제목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도 이미 알고 있다. 오프닝 타이틀로 먼저 ‘EVIL EXIST’를 보여주고, 한 박자 늦게 ‘DOES NOT’을 덧붙이는 너스레를 떨기 때문이다. 주장을 던졌으면 그다음엔 근거를 제시할 차례다. 영화는 숲 속에서 수직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쇼트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나무와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어떻게 악이 있을 수 있겠냐’는 순진하면서 겸손한 태도다. 이어지는 쇼트는 관객에게 이 시점의 주인을 지시한다. 바로 고개를 치켜든 여자아이, ‘하나(니시카와 료)’다. 관객의 마음에 동의가 싹트려는 찰나에 전기톱 소리가 무섭게 화면 안으로 틈입한다. 앞선 장면과 달리 이번엔 남자 어른인 ‘타쿠미(오미카 히토시)’가 나무를 내려다보고 능숙하게 절단한다. 장면과 장면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상충하는 두 장면 때문에 관객은 판단을 유보하고 긴장을 품은 채 영화를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를 아는 관객에게 <악은..>의 도입부는 당황스럽다. 그의 영화가 이처럼 과묵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그의 영화에서 대화와 경청, 그 둘 사이 인력은 언제나 중요한 추동이었다. 그러나 <악은…>은 타쿠미와 우동집 남자 사장이 함께 냇가에서 물을 뜨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첫 대화가 등장한다. 이 시퀀스에서 대화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시선이다. 두 인물은 땅 와사비를 발견한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타쿠미와 남자 사장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관객은 영화와 눈이 마주친다. 감독은 이런 연출에 대해 ‘영화와 관객이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길 바라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인 수사와 달리 이 장면은 관객을 향한 불호령에 가깝다. 영화는 관객에게 안전한 극장에서 관음하길 멈추고 정체를 드러내라고 촉구한다. 관객은 피식자의 위치에서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언급한 이 장면은 땅 와사비의 시점 쇼트, 이후 등장하는 유사한 장면은 죽은 사슴 뼈의 시점 쇼트이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는 관객의 위치를 전복시켜 우리가 영화 속 세계에 동참하고 함께 영향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만약 이 영화 속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 폐해도 동일하게 관객의 몫이다.


 이처럼 안온한 관객성을 위협하는 연출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먼저 <악은…>은 초당 프레임을 조작해 화면을 어색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영상은 여러 장의 사진을 빠르게 보여주는 기술이고, 영화는 대게 1초에 24장의 사진으로 이뤄진다. 반면 <악은…>은 24장보다 더 많은 컷을 삽입해 영상이 더 사실적이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자동차가 달리는 장면, 또는 프레임 안팎으로 무언가 들어오고 나가는 순간은 이런 효과를 더욱 부각한다. 더 높은 초당 프레임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장면을 목격한다는 의미다. 이는 영화에 ‘관찰’이라는 콘셉트를 강화한다. 이런 기술적인 조작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신경을 건드린다. ‘낯설게 하기’는 관객이 작품에 더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방해 장치 덕분에 관객은 눈앞의 세계가 영화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인식하며 더 의지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정면을 응시하는 배우들, 또는 예상치 못한 순간 분절하는 음악도 마찬가지로 관객을 고양한다. 도입부의 짧은 시간 동안 이처럼 다양하고 정교한 설계로 영화는 관객에게 ‘똑똑히 보라’고 거듭 강조한다. 당부가 끝나면 그다음은 관객을 시험할 차례다.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느냐고.


 타쿠미는 하나의 하교 시간을 깜빡하고 뒤늦게 학교로 찾아간다. 이때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 이 놀이에서 참가자는 술래가 눈을 뜨면 움직일 수 없고, 눈을 감았을 때만 움직일 수 있다. 무언갈 ‘본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영화의 맥락 속 이 규칙은 의미심장하다. 술래의 ‘관찰’이 놀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런 규칙 때문에 술래는 눈을 감은 동안 다른 아이들의 위치와 방향, 심지어 존재도 확신할 수 없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놀이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신체적, 영화적 비유다. 이때 관객은 스스로 놀이 속 술래보다는 더 나은 상황에 놓였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눈을 감지 않았고 카메라는 고정된 채 우리에게 무언가 계속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쿠미가 하나를 찾아 학교를 떠날 때 우리는 두 눈을 의심케 하는 카메라의 이동을 목격한다. 운동장에 고정된 카메라가 어느새 타쿠미의 차 꽁무니에 실려 타쿠미와 함께 학교를 떠난다. 이 사이에 우리는 이 카메라를 움직이거나 차에 싣는 어떤 행위도 목격하지 못했다. 영화는 눈 깜짝할 새 마술을 부리곤 그 여운을 롱테이크로 남긴다. 이제 관객에게 본다는 건 의심스러운 일이다.


 객석의 관객처럼 영화 속 인물들도 무언갈 바라보고 있다. 마을에서 글램핑장 건설 사업 설명회가 열리고, 주민 수십 개의 눈이 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회사 직원 두 사람을 노려본다. 주민들은 직원들을 향해 사업 계획의 허점을 지적하며 예상할 수 있는 문제들을 나열한다. 사측의 반론은 모두 모순에 부딪힌다. 주민과 회사 직원들 사이 말과 말이 랠리를 이루다 결국 설명회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난다. 이 설명회의 맹점은 이 모든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정말로 글램핑장이 만실일지, 숙박객들이 산에 불을 지를지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을 주민의 눈을 빌린 우리는 확신한다. 저 두 직원은 이 마을을 해칠 침입자 악당이라고.


 하지만 카메라가 마을 주민의 눈으론 볼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설명회장에서 의기양양하던 ‘타카하시(코사카 류지)’는 사무실에선 이 계획 전체에 반대 의견을 낸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한 꺼풀 안으로 더 들어간다. 마을로 향하는 차량 내부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우리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악당이 아닌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이때 오가는 말들이 무척이나 사적이고 진솔하며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타카하시의 입에서 ’ 외롭잖아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내내 관객을 불편하고 긴장케 만들던 영화가 여린 속살을 보인 것 같아 그 정서가 더욱 진하다. 이제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이 영화를 봐야 할까. 차는 마을에 도착한다.


 영화 초반에 그랬듯 타쿠미는 장작을 팬다. 이번에는 타카하시가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며 장작 패기를 시도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속에선 모든 일이 두 번 일어나고, 둘 사이 선택의 차이가 이야기의 양상을 크게 바꿔버린다. 타카하시의 장작 패기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 이를 계기로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제 침입과 진입의 경계가 흐려진다. 타카하시의 귀촌 선언은 <리틀 포레스트>를 비롯한 일본 영화 속 클리셰와는 궤가 다르다. 앞서 반복해 언급된 코로나라는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저)는 구 시대를 ‘면역학적 시대’라고 명명했다. 페스트와 돌림병이 숱하던 시대에 피아식별과 배타성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항생제의 발병으로 면역학적 시대는 막을 내리고 또 다른 시대와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 기술한다. 물론 모두 팬데믹 이전의 이야기다. 코로나는 인류를 다시 면역학적 시대로 돌려버렸다. 이제 이전과 같은 순진한 태도의 슬로우 무비는 불가능하다. 타카하시는 면역체계를 자극하는 또 하나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이때 눈에 띄는 몽타주가 하나 틈입한다. 축사에서 놀고 있던 하나는 숙성 중인 소똥 더미 앞을 코를 막고 뛰어간다. 소똥에서 피어오른 김은 타쿠미 일행이 있는 식당 우동의 김과 매치 컷을 이룬다. 정화조의 오수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 지하수로 끓인 바로 그 우동 국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분뇨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마을 안에도 똥이 존재한다. 영화는 중립적인 태도로 상충하는 것들이 동시 존재함을 제시한다. 이에 뜨끔하거나 긴장하거나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건 모순을 채 통합할 수 없는 관객의 몫이다. 2020년대는 유례없이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중세만큼 배타적이다. 머리로는 타카하시를 수용하지만, 가슴으론 경계심을 감출 수 없다. 호의와 악의가 동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타쿠미 일행의 식사 시퀀스는 예리하고 시의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앞서 일어났던 일이 또 한 번 반복된다. 타쿠미가 하나의 하교를 잊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영화는 어떤 정황들을 보여준다. 피가 맺힌 가시나무를 보여주고, 얼음이 깨진 연못 앞에 놓인 깃털을 보여주는 식이다. 하지만 그 피는 하나가 아닌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의 것이다. 깃털을 주운 타쿠미는 하나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목격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마침내 타쿠미와 타카하시는 평원에 이른다. 이 평원은 슈레딩거의 고양이가 담겨있는 상자 내부다. 양립할 수 없는 사실들이 몽타주를 이뤄 동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몰 후 헉헉거리며 숲을 뛰어다가는 그 시선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나를 업은 타쿠미일까, 기절했다 깨어난 타카하시일까, 또는 총에 맞은 사슴일까. 카메라가 숲 아래를 비추기 전까지 이 모든 게 참이다. 우리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에 동의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 모두 악을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기‘를 끊임없이 공격당한 우리에게 ’악은 존재한다‘는 말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주장이 되고 말았다. 악과 선이 동시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단언할 수 있는 건, 어떤 폭력은 일어나고 말았다는 사실 뿐이다. 영화는 막을 내려도 숲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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