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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Oct 05. 2022

서른이 넘어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리처드 커티스 극본의 노팅힐(1999)

유열의 음악 앨범첨밀밀은 운명적인 첫사랑을 다룬 영화다. 대학 시절 독립한 나로서는 스무살 언저리에 느끼는 청춘의 불안함과 첫사랑을 잘 엮어낸 그 영화들에게서 큰 울림을 느꼈다. 그런데 만약 그 순수한 첫사랑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어느덧 서른을 넘겨 버렸다면? 괜찮다. 우리에겐 아직 노팅힐이 있다.


영화 노팅힐의 OST 음반 커버


윌리엄 대커(휴 그랜트)는 런던의 한 귀퉁이 노팅힐이라는 동네에서 여행서적 전문 서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노팅힐은 아름답고 정겨운 동네이지만, 여행서적이 잘 팔리는 곳은 아니다. 윌리엄의 주변 인물들도 한결같이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윌리엄의 룸메이트 스파이크는 직업도 없고, 위생 관념도 없고, 상식도 없고, 무엇보다 예의가 없다. 윌리엄의 서점에서 일하는 마틴은 기억력도 형편없고 낯을 심하게 가려 과연 밥값을 하는 직원인지 의심이 든다. 윌리엄의 어머니는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어디가 아프다고 불평을 해대고, 철없는 여동생은 아직도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행동한다. 서점을 찾아오는 손님도 진상 아니면 좀도둑. 한숨이 절로 나는 인물들의 향연이다.


이런 윌리엄의 서점에 어느날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이 찾아온다. 선글래스로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헐리웃에서 날아온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몰라볼 수는 없다. 마틴도 좀도둑 손님도 애나를 알아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오직 윌리엄만이 애나를 알아보고도 차분하고 침착하게 평범한 손님처럼 대한다. 제아무리 수퍼스타라도 서점에 들어와 책을 살 때는 그저 한명의 고객일 뿐 호들갑을 떨며 유난스럽게 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보통 사람들처럼 쇼핑하고 식사하고 길을 걸을 자유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 않지 않겠는가? 윌리엄의 이런 사려깊은 행동은 애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애나가 유명세를 호되게 치를 때마다 윌리엄을 찾아와 의지하게 된다.


I live in Nottinghill. You live in Beverly Hills. Everyone in the world knows who you are, my mother has trouble remembering my name.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윌리엄의 대사처럼, 그 남자는 노팅힐에 살고 그 여자는 베벌리힐즈에 산다. 그 여자의 이름은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남자의 이름은 그 어머니조차 깜빡깜빡할 정도이다. 두 사람은 어떻게 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대사가 재미있는, 전형적인 휴 그랜트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개봉한 영국 영화 중 가장 크게 흥행 수익을 남겼고, 영국 아카데미상, 영국 코디미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영화 음악도 브리트상을 받았다. 도대체 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과 무엇이 다르길래?


이 영화는 무척 성숙한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룬다. 인생 겪을 만큼 겪었고, 알 거 다 아는 사람들. 둘 다 사랑에 실패해 본 적도 있다. 윌리엄은 이혼남인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사람과 결혼했다가 왜 헤어졌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애나에게는 세상이 다 아는 셀럽 남자친구가 있는데, 바람둥이인데다가 뭐든 자기 위주이고, 한 마디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역시나 자세히는 다루어지지 않지만, 애나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연애를 이용해 보기도 했고 같은 목적으로 이용 당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애나와 윌리엄은 모두 이성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고, 그만큼 사람을 보는 눈도 성숙한 상태다.


애나의 가장 큰 매력은 엄청난 미모와 인기, 화려한 커리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언젠가 순식간에 사라질 거품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내팽개칠 용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윌리엄의 가장 큰 매력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신사적인 매너와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수퍼스타인 애나 스콧에게도 여느 손님과 다르지 않게 대하며, 무일푼 놈팽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룸메이트에게도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소개팅 상대에게도 끝까지 예의를 지키고, 아무리 엉뚱한 소리를 해도 잘 들어준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영화는 쿨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윌리엄은 애나의 엄청난 미모와 명성, 사회적 지위와 부에 위축되는 평범한 남자로 표현된다. 계속해서 애나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도 윌리엄은 애나와의 관계에 어떤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당에서 낯선 남자들이 큰 소리로 애나의 뒷담화를 하자 용감하게 그들의 비신사적인 행동을 지적한다. 그녀의 숨기고 싶은 과거에 대해 전세계가 조롱하고 비난할 때는 조용히 안식처를 내어준다. 역시 어떤 댓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윌리엄의 이 모든 행동은 순수하게 한 인간, 한 여성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 것이었다. 사실 윌리엄은 애나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런 곤경에 처했다면 똑같이 했을 것 같다.


윌리엄의 이런 인품은 애나에게 더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속한 세상은 한없이 계산적이고, 가식적이다. 눈앞에서는 한없이 추켜 세우지만 등 뒤에서는 시기, 질투, 추잡한 관음증과 일상적인 성희롱이 난무하는 곳. 그녀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 눈부신 조명과 카메라가 사라진 후에도 그녀를 변함없이 사랑할 사람이 그 세상에는 없다. 애나는 어느 날 메이크업 하나 없는 얼굴, 소박한 데님 스커트에 슬리퍼를 신고 나타나 윌리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너무나 윌리엄답게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고 만다.  




연애도 결혼도 당사자와 부모의 학력, 직업, 재산 정도에 따른 "급"이 맞아야 주변의 축복을 받는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 쪽이 기운다거나, 한 쪽이 아깝다거나 하는 불쾌한 얘기를 서슴없이 뱉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밑지는" 결혼이라는 말도 들어봤다. "밑지는"이라는 형용사가 "장사"라는 단어 다음으로 "결혼"이라는 단어와 자주 함께 쓰인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들 대다수는 취업 시장에 나가고 몸값을 평가 받으며 노동력을 파는 처지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선 시장에 나가 내 몸값등급을 확인 받고, 밑지거나 기울지 않는 상대를 찾는 것까지는 정말이지 말리고 싶다. (이래서 내가 낭만적이라는 말을 좀 듣는다)


만약 윌리엄과 애나가 각각 결혼정보회사에 회원 등록을 했다면 어떨까? 윌리엄은 최하위, 애나는 최최최최최상위로 분류될 것이다. (결혼정보회사 시스템을 잘 몰라서 이 정도로...) 하지만 이 동화같은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애나가 아무 것도 없는 윌리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까이는 장면을 아주 설득력있게 표현했다. 애나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나쁜" 여자였다. 그녀는 윌리엄에게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었지만, 윌리엄은 그녀에게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다. 부와 사회적 지위는 윌리엄에게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전지구적인 관심과 주목도 은둔 성향의 윌리엄에겐 반가운 것이 아니다. 윌리엄이 애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무척 현실적이고 현명하게 보인다. 


최근 방송 중인 드라마 중에 MBC의 금수저와 tvN의 작은 아씨들 예고편이 눈길을 끌었다. 두 드라마 모두 부자와 빈자의 극명한 대비, 돈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소재로 자극적인 스토리를 엮어가는 것 같다. 대중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고 돈이 전부인 듯한 시류에도 잘 맞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지겹고 신물난다면, 잠시 노팅힐에서 쉬어가기를 권한다. 영화는 후반부에 급격한 반전을 일으키며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내레이션 대신, 아이들이 뛰노는 정원 한 켠에 임신한 애나가 윌리엄의 다리를 베고 누운 장면으로 끝이 난다. 어떻게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는지는 영화를 (다시) 보면서 확인하길 바란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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