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엘리멘탈> 입니다. 오늘은 픽사의 오리지널 작품인 <엘리멘탈>을 바탕으로 원작(IP)이 없는 '오리지널' 작품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합니다.
IP란 무엇인가
지난 회에서 최근 흥행하는 극장 영화들의 특징을 꼽을 때, ‘IP가 기반인, 영화적 체험을 주는, 완성도가 훌륭한’이라는 3가지 조건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서 첫 번째 조건인 ‘IP’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IP는 지적 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로, 온갖 산업재산권 혹은 예술작품의 저작권 등을 의미하는 광범위한 개념인데요. 여기서는 대중예술(영화, 게임, 만화, 소설 등)의 저작권을 지칭하는 말로 한정 짓고자 합니다.
IP, 즉 원작이 있다는 것은 흥행이 보장된, 성공 경험이 있는, 팬덤이 있는 이란 뜻과 동일한 뜻이기도 해요. (물론 IP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요) 그래서 자본력이 풍부한 스튜디오 혹은 제작사들은 IP를 사들여서 이를 기반으로 영상작품으로 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때 많은 콘텐츠 혹은 관련 없는 회사들이 OSMU라는 단어에 혈안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죠. IP를 발굴한다는 이유로, 자본을 끌어모아 사들였으니까요. IP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진 패가 많아지는 것이죠.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한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웹소설, 웹툰 회사들의 지분을 인수한 것도 그 이유입니다. 네이버 같은 경우는 웹툰엔터 산하에 ‘네이버 웹툰’ 을 통해 웹소설 플랫폼인 문피아나 영화,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엔을 두고 있고요. 세계 최대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인수하기도 했죠.
넷플릭스가 콘텐츠 전략으로 <기묘한 이야기>로 대박을 치고 <브리저튼><오징어게임>과 같은 시리즈를 계속해서 찾고 있는 걸 봐도 그래요. 특히나 구독자 해지율을 줄이고 유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인기 IP의 존재 유무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넷플릭스의 IP)의 비중을 점점 늘리고 있고요. (넷플릭스가 제작사와 작품 계약을 할 때 저작권을 모두 소유한다며 욕을 먹지만, 넷플릭스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입니다)
픽사 오리지널은 끝났다?
저는 오리지널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회사는 픽사(Pixar)인데요. 픽사는 꾸준히 오리지널 작품들을 매년 내놓고 있죠. 물론 <토이 스토리> <인크레더블> 같이 시리즈 형태로 내놓고 있는 작품도 있지만, 매년 고퀄리티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제작합니다. 최근 내놓은 작품으로는 <엘리멘탈><온워드><소울><루카><메이의 수상한 비밀> 등이 있습니다. 모두 오리지널 작품이죠.
<엘리멘탈>의 경우
최근 한국에서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하고 있는 <엘리멘탈>을 둘러싸고 픽사 오리지널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엘리멘탈>은 미국에선 실망스러운 오프닝 성적을 보였습니다. 오프닝 스코어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벌어들인 북미 수익이 1.2억 달러가량이며 전 세계적으로는 2.6억 달러 남짓이죠. 순 제작비만 2억, 마케팅 비용까지 합치면 총 3억 달러의 제작비가 예상되는데, 단순 계산해서 수익이 나려면 2배인 6억 달러는 벌어야 하니까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오프닝 이후로 드롭률이 예상보다는 낮았고, 해외에서 흥행이 꾸준하다는 점이겠네요.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지만요…
로튼토마토 지수도 70%대여서, 그간 픽사 영화 기준으론 엄청 낮은 수준이고. 한국의 CGV 골든 에그 지수 98%인 것과 아주 비교가 되는데, 정말 한국에서 유독 잘 먹히는 영화라는 평이 맞긴 하죠. (한국에서 흥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영화의 스토리를 잘 표현한 낭만적인 감상평(아래 사진)과 지독히도 K스러운 내용이라는 점이 꼽힙니다)
픽사의 작품이 문제인 것일까요?
픽사는 사실 ‘픽사’라는 이름 자체가 훌륭한 IP에 가깝습니다. 일본의 ‘지브리’ 작품과 같이 ‘픽사’ 이름을 달고 나오면 작품에 대한 신뢰도가 생겼달까요. 그간 쌓아온 훌륭한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팬데믹 시대 이후로 흥행한 영화가 드물다는 게 그간 쌓아온 신뢰도에 금이 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명성이 예전만 하지 않다는 소리입니다.
그간 픽사가 추구했던 방향은 ‘루카스 필름’의 스타워즈, 공주 시리즈 등 기존 원작을 실사영화로 리부트하고, 시퀄 스핀 오프 등 다양하게 내놓고 있는 디즈니 영화의 전체의 방향과는 살짝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훌륭한 오리지널이 나오면 이를 바탕으로 시리즈화 시킬 수도 있으니 어쩌면 쌍방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수십 년간 이게 잘 먹혔고, 훌륭한 작품들도 많이 나왔습니다만…
픽사 애니메이션이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는 디즈니 플러스로 직행하거나(<루카><메이의 새빨간 비밀>) 극장 개봉 이후 아주 조금만 기다리면 디즈니 플러스에서 볼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생긴 것 지목되는데요.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인사이드 아웃>이나 <코코>같은 깊은 통찰력과 임팩트 있는 작품이 없었던 것도 슬프지만 현실입니다. 예전같이 전 세계적으로 영화 산업이 부흥했을 시절에는 이런 실패들이 용인되었겠지만, 예전만 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릅니다.
즉, 오리지널 작품이 흥행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대단히 재밌다’라는 평가가 필요한데 이를 충족시켜줄 만큼 대단하진 않았단 뜻입니다.
그래서 디즈니도 결국 슈퍼 IP에 힘을 쏟는 모양새인데요. 최근 위기에 빠진 디즈니의 구원투수로 다시 등장한 대표 밥 아이거가 주주들을 달랠 심산으로 <주토피아2> <토이스토리5><겨울왕국3> 등을 발표한 것을 보면 얼마나 성공한 IP의 힘이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역대 프랜차이즈 미국 박스오피스 성적을 보여주는데, 디즈니의 마블과 스타워즈의 위엄이 엄청납니다.
오리지널? IP?
보통 영상 작품에서 원작이 없는 작품을 ‘오리지널’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IP의 반댓말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는 IP 없는 온전한 작품을 지칭하는 말로 쓰려고 해요. 물론 잘된 오리지널은 IP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흥행을 하게될 경우, 이를 바탕으로 2차저작물들이 나오게 되고 파생된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면 이젠 그 자체가 IP가 될 테니깐요.
최근 작품들을 보면 대형 스튜디오들의 ‘원작 사랑’ 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요.
최근엔 노장 해리슨 포드의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이 개봉했고, 30년 가까이 된 영화를 리메이크하여 <탑건 : 매버릭> 이 나오기도 했죠. 넷플릭스는 애덤스 패밀리라는 인기 시리즈의 ‘웬스데이’ 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 <웬즈데이>를 내놓아 인기를 끌기도 했어요.
이건 비단 미국 원작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데, 슬램덩크의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나와 흥행했고, <원피스>의 실사판이 곧 공개 예정인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최근 <엘리멘탈><인디아나 존스> 등 부진한 실적을 보인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흥행하고 있는 <인시디어스: 빨간 문>이라는 공포영화도 프랜차이즈죠. 아래 팬데믹 이후로 흥행한 영화들을 보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작품이 많은데요. 이 중에서도 블룸하우스(호러계의 pixar가 아닐지)와 합작한 작품들이 많은 걸 보면 역시 IP의 힘은 어떤 장르에서도 통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향수는 돈에 관대해지게 만들고(이 정도는 쓸 수 있지 하는 마음), 지갑을 더 쉽게 열게 만드는 도구라고 하는데 기존 인기 있었던 IP를 ‘끌올’ 하는 것은 제작비나 마케팅 비용적인 측면에서 리스크를 줄이는 데 아주 도움이 됩니다. 정말 오리지널과 IP 원작이 있는 작품은 기본 가져가는 ‘인지도’ 부터가 다릅니다.
22년 상반기의 미국에서 만들어진 신규 콘텐츠의 3분의 2가 기존 IP에서 나왔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프랜차이즈 피로도
한쪽에서는 오히려 프랜차이즈 IP에 대한 피로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마블, DC 유니버스부터 해리 포터(<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까지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들이 힘을 못 쓰고 있기도 하니까요. 기존 팬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안정감을 주는 프랜차이즈들은 누군가에게는 세계관을 모르면 보기 힘든, 외워야 할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은, 진입 장벽 높은 피곤한 영화일 수도 있어요.
물론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잘 만든 시리즈는 기존 팬덤이 다시 화답하기도 하니까요 디즈니 입장에서는 최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의 흥행에 크게 안도했을 겁니다. 유니버설이 선보인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애니메이션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가족영화로 크게 흥행하기도 했고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결국 얼마나 원작의 매력을 잘 살릴 수 있는지, 지금 트렌드에 맞게 각색을 했는지, 얼마나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줬는지 등이 IP 원작의 흥행에 중요한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IP라고 흥행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오리지널이라고 잠재력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가능성의 문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IP에 대한 수요는 점점 커질 것 같아요. 특히, 극장의 침체가 계속되고 예전만큼 관객들이 관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기 있는/검증된 IP에 대한 유혹은 더 커질 것이고요. 거기에 그냥 IP가 아닌 정말 정말 인기 있는 슈퍼 IP 그리고 프랜차이즈 IP에 대한 재생산은 지속될 것으로 보여요. 리스크를 줄이고, 최소 비용 최대 효과를 끌어내고자 하는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러합니다.
그런데 창의성과 기회의 측면에서 보자면, IP의 힘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 그리 반가운 상황은 아닙니다. 소수의 검증된 작품만 제작되고, 오리지널 작품이 후순위로 밀린다면 소수를 제외한 창작자들은 바늘구멍 같은 기회를 노리거나 ‘각색자’ 역할만 하게 되겠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최근 빅테크들이 웹툰, 웹소설 등 IP에 공을 들이는 것도 결국엔 자신들의 소유인 AI가 IP를 만들어내는 미래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실제 네이버 웹툰 작가들은 네이버와 계약시에 데이터 제공에 동의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학습시킨 생성형 AI가 나올 예정이라고 해요. 네이버가 보유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바탕으로 학습한 AI가 언젠가는 초보적인 ‘채색’ 단계를 넘어,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산되어, 성공이라도 한다면? 빅 테크는 관리가 힘든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보다는 AI의 것을 선호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인간이 만든 (리스크가 큰) ‘오리지널’의 가치는 바닥으로 더 떨어지지 않을까요?
또 이런 질문도 하고 싶어요. AI가 창작한 IP는 고유의 창작물이 맞을까요? 지금까지 저작권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이 표현된 것으로, AI가 만든 결과물을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만약 AI 그림에 인간의 시간과 노력이 더해진다면, 저작권이 인정될 수도 있겠죠. 어떻게 될지 앞으로 잘 지켜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