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과 '퍼펙트 데이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는 10월 17일 오후 7시 30분부터 서촌 보안여관에서 운영하는 카페보안에서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 출간을 기념하는 두 번째 북토크를 엽니다. 그리고 나의 단일한 에세이집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에는 ‘퍼펙트 데이즈’라는 글이 있습니다.
히라야마는 하루하루 일정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을 유지한다. 일을 마치고 나면 집에 돌아와 화초를 돌본 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집을 나선다.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에 가서 개운하게 목욕을 한 뒤 인근의 단골 가게에 가서 하이볼 한 잔을 마시며 요기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이부자리를 펴고 바닥의 스탠드를 켜고 누워서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불을 끄고 잠이 든다. 그렇게 일상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렇게 반복되는 매일이 늘 동일한 판본처럼 똑같을 리 없다. 평온하기만 한 삶을 흔드는 뜻밖의 사건이 틈입하고, 끝내 연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애수가 드리운다. 타고난 평정의 주인처럼 보내는 줄 알았던 하루하루가 실상 그렇지 않다면,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를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버티며 전력을 다해 기도하듯 보내는 것이라면, <퍼펙트 데이즈>라는 제목은 첫인상과 달리 심중하게 다가오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매일마다 일정하게 일상의 균형을 잡는 이의 삶이란 타인의 시선 안에서는 평온과 평정의 연속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을 바로잡는 아슬아슬한 나날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어제와 달리 오늘의 평온을 부수는 예기치 않은 우연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내일의 평정을 위협하는 어제의 심연이 개개인의 삶 어딘가에 어떻게 똬리를 틀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위태롭고 위협적인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의 마음에 너른 여유가 깃들어 있는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일찍이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다부진 어제를 덧대고 쌓아온 덕분일지도 모른다.
가끔 바라는 곳에 다다르거나 바라는 이를 마주하거나 바라는 바를 얻기도 하지만 대체로 헛헛한 갈망과 미흡한 갈증과 미만한 열망을 견뎌야 할 때가 대부분인 삶의 까닭을 밖에서 찾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더욱 헛헛하고 미흡하며 미만한 나를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제는 그런 마음을 끊으려 노력한다. 수양이 덜 된 마음이 간혹 그리로 넘어지려 하나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다소 편하다. 다만 심각하게 망가지거나 돌이킬 수 없게 어리석지는 말자고, 적어도 비겁하거나 치졸하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마음이 닿으려는 곳에 있었다면 그 마음을 속이지 말고 그 마음의 결과를 기만하지도 않고 싶다. 살아가는 데까지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가고 있는 데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충실하게 느껴보려는 노력과 그런 순간이 요즘은 더욱 중요한 거 같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요즘은 기우는 마음을 따라 솔직하게 넘어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더더욱.
올해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관한 글이기도 하지만 이 글은 영화만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에 관한 배후 정보와 개인적 감상이 담겨 있긴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발견하고 정리한 생각들에 관한 소회에 가깝습니다.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에 담긴 몇 안 되는 영화와 관련한 글이자 영화 제목을 내건 유일한 글이기도 하죠. 그만큼 올해 저에게 <퍼펙트 데이즈>가 말해주는 바가 큰 영화였다는 것이겠죠. 이것이 오는 목요일인 10월 17일 서촌 보안여관 옆 카페보안에서 열릴 두 번째 북토크에서 <퍼펙트 데이즈>에 관해 말하게 된 전말입니다.
‘이것은 가을을 위한 책이 아니다’라는 백커버의 문장처럼, 가을은 거들뿐, 저는 처음부터 이 책을 가을을 위해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을이라는 분위기 안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떨어뜨려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떨어뜨릴 말들을 한데 모아 가을을 맞이하고 다음 계절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서촌에서 두 번째 책을 썼고, 첫 에세이집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서촌의 의미 있는 공간에서 북토크를 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촌을 대변하는 가장 의미 있는 공간을 하나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보안여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1942년부터 명맥을 이어오며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한 보안여관은 더 이상 여관이 아니지만 여전히 서촌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장소라는 점에서 어쩌면 서촌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접객의 장소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촌에서 11년째 살아가는 제 입장에서 보안여관의 보안카페에서 첫 에세이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보안여관의 명맥을 현재형으로 이어가고 계시는 최성우 대표님께서 함께 자리하며 대화를 나눠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구소산 비금봉만한 자부심이, 마침내.
그런 의미에서 보안카페에서 <퍼펙트 데이즈>를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그만한 의미가 있는 일일 겁니다. <퍼펙트 데이즈>는 일본 도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을 리모델링하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로 인해 태어난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었습니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는 일본의 비영리단체 도쿄 파운데이션에서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해외에서 찾아올 손님을 환대한다는 의미로 도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 17개를 리모델링했습니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쟁쟁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대거 참여했고, 그 결과물도 상당히 준수합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팬데믹과 함께 2020 도쿄올림픽은 2021년에서야 무관중 개최가 이뤄지며 멀리서 온 손님을 환대한다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의미가 무색해졌죠.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취지를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영화입니다. 그래서 극영화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다큐멘터리 거장이기도 한 빔 벤더스에게 연출 제안을 했고, 이는 도쿄를 좋아하는 빔 벤더스에게도 반가운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쿄를 찾은 빔 벤더스는 새롭게 단장한 공공화장실을 보며 제안과 다른 구상을 했고, 극영화 제작으로 방향이 선회했죠. 그것이 <퍼펙트 데이즈>가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된 전말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코모레비’였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의미하는 코모레비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죠. <퍼펙트 데이즈>는 그런 순간을 위한 발견의 영화였고, 그러한 발견이 영화의 정신처럼 곳곳에 일렁이는 것만 같죠.
이렇듯 ‘보안여관’과 <퍼펙트 데이즈>는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많은 고유명사입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공간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접점을 만들어가는 노력과 성취란 결국 훌륭한 이야기로 보전하고 전승되는 법이죠. 그것이 보안여관의 후손 같은 공간인 바로 옆 보안카페에서 북토크 할 결심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에서는 <퍼펙트 데이즈>를 바탕에 둔 에세이 글도 있기에 함께 읽고 설명을 들어보면 훨씬 흥미로운 가을의 코모레비가 될 것입니다. 영화를 봤다면 더욱 흥미로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그 전에 서촌 최강 힙스터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님께서 모더레이터로 참석해주시는 1부 북토크에서 내 책에 관한 질문을 해주실 예정이다. 앞서 몇 차례 말한 바 있는 것처럼 <퍼펙트 데이즈>에 등장하는 도쿄 시부야 공공화장실과 보안여관은 여러모로 닮았다고 생각하기에 보안여관의 카페보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너무 상징적.
이처럼 비로소 찾아온 가을에 영추문을 마주한 서촌 보안카페에서 가을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고로 마음이 동하신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기꺼이.
그렇다면 그곳에서, 마침내.
가을이 와서 떨어진 북토크에서 가을밤의 퍼펙트 데이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