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플랑크톤>의 주역 우도환, 이유미, 오정세는 각자 고유하기에 완전한 셋이 되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각기 다른 면면으로서 명료하게.
우도환은 완전히 지금
<미스터 플랑크톤>은 제목만큼이나 엉뚱한 로맨틱코미디다. 엉뚱한 ‘씨’로 잘못 태어나 가족 없이 방랑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해조는 결혼 직전 뜻밖의 이유로 절망에 빠진 전 연인 재미와 동행하게 되고 재미의 결혼 상대였던 어흥이 그 뒤를 쫓게 된다. 설명만 들어서는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우도환은 바로 그 문제의 ‘미스터 플랑크톤’ 해조를 연기했다.
<미스터 플랑크톤>에 함께 출연한 오정세는 우도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해조처럼 자유분방한 타입일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촬영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해조가 돼 있는 거예요. 되게 신기했죠.” 해조는 방랑하는 인물이다. 어느날 종양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인물이다.
하지만 우도환은 스스로 자기 삶의 규격을 정하고 적절히 통제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편인지라 해조와는 정반대 유형의 삶을 살아왔다. 우도환이 해조를 연기한다는 건 자신과 다른 삶을 이해하는 여정이었다. “해조는 사실 저랑 너무 다른 타입이에요. 완전 정반대죠. 저는 무모하게 막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해조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점점 알게 됐어요. 이 친구는 무모한 게 아니라 방랑할 수밖에 없는 삶에서 계속 자신만의 선택을 했더라고요.”
배우라는 직업은 이처럼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캐릭터를 테일러드 수트라도 착용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화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배우라는 길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연기란 결국 삶으로 포괄하는 부분의 영역이지만 의외의 경험을 불어넣고 삶의 여지를 살피게 만드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 우도환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스스로 어떤 모습을 떠올릴지 궁금해졌다.
“군인이나 럭비선수?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자기 자신을 강하게 단련하며 살면 좋을 것 같아요. 되게 힘들어 보일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어쩌면 배우로 사는 것도 비슷한 점이 있긴 하죠. 항상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니까.” 문득 <사냥개들>에서 연기한 김건우가 떠올랐다. 우직하게 한 걸음씩 내딛고 나아가 뻗는 건실한 주먹. “사실 운명은 별로 상관없는 것 같아요. 어쩌다 우연히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이라면 그게 바로 그 운명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결국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게 중요해요. 그걸 운명이라 한다면,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그렇다면 만약 플랑크톤처럼 사람이 아닌 무엇이 돼야 한다면 우도환의 선택은? “수명이 가장 짧은 생물? 최대한 빨리 죽고 싶어요. 그래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겠죠. 가능하면 지금처럼 계속 살고 싶은데요.” 지금 이외의 무엇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우도환이 말했다. 엉뚱함과 실없음조차 끼어들 겨를 없이 완전히 지금.
이유미는 너무너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세간의 관심 앞에 서는 입장이 된다는 것은 그 당사자의 입장이 되지 않는 이상 당최 알 수 없는 세계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으로 주목받기 이전에도 이유미는 계속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분명 그 이전과는 다른 입지 위에 놓인 배우가 됐다. 하지만 타인과 세상의 시선이나 평가와 무관하게 당사자의 일상이란 파편적인 사건으로 우뚝 서서 거기 멈춰 있는 게 아니다. 유유히 흘러온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으로서 고유하다.
“저는 그냥 배우로 사는 게 좋았어요. 연기만 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죠. 연기하는 게 저는 정말 재미있거든요.” 연기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이유미가 <미스터 플랑크톤>에서 재미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만난 것이 운명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이런 사랑을 했고 이런 삶을 살아온 이 캐릭터는 어떤 감정으로 살아갈까? 재미를 연기하며 세세한 감정이나 습관을 돌아보게 돼요. 힘든 삶을 살았지만 솔직하고 강단있는 친구예요.”
역설적이지만 <미스터 플랑크톤>의 재미는 불운한 여자다.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족이 갖고 싶었고, 그래서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의 불운과 맞닥뜨린다. 대를 잇기 위해 종갓집 며느리라는 삶을 선택하자, 조기 폐경이라는 뜻밖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추구하던 행복의 가능성이 삽시간에 붕괴된 이후로 찾아온 건 뜻밖의 재회와 방황의 여정이다.
“재미가 엄마가 돼서 화목한 가족을 꾸리고 싶었던 건 엄마가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그 기회가 사라지니까 방황하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거죠.” 삶이란 이렇듯 명확하다고 여긴 목적지에서 이탈한다 하여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젠가 같은 것이 아니다. 갖고 싶은 삶이 아니라 해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죽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이유미는 어떨까? 이토록 재미있는 연기가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해야 한다면?
“김밥을 너무너무 좋아하거든요. 집에서 쉬면서 TV 보다가도 김밥 말아서 먹고, 저녁 먹을 때 되면 또 김밥 말아서 먹고, 종일 먹어도 안 질려요. 그러니까 만약 다른 일을 한다면 김밥집 사장님?” 배시시 웃는 미소 덕분에 진짜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있구나 절로 실감했다. 물론 이유미가 당장 김밥집을 차려서 김밥을 말고 있을 겨를은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주연을 꿰차며 글로벌 스타의 지위에 오른 배우의 삶이 당장 그렇게 소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여자 게스트상 트로피까지 거머쥔 이유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미스터 플랑크톤>의 주연으로 돌아온다는 건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촬영을 마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요즘 들어 ‘아, 이거 로코 맞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찍을 때는 ‘웃기긴 하는데 이게 로맨틱코미디가 맞을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죠.” 그러니까 결국 어디든, 무엇이든, 연기는 너무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일이다. 이유미가 배우로서 살아간다는 건 이처럼 너무너무.
둘도 없는 단 하나의 오정세
사자성어처럼 고리타분한 수사를 적확한 용례처럼 떠오르게 만드는 삶이 있다. 오정세는 정말 대기만성이다. 단역으로 경력을 시작한 뒤로 10여 년 넘게 작은 역할을 맡으며 꾸준히 연기 경력을 이어왔다.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계속 연기했다. 만인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어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자신이 디딜 수 있는 영역을 넓혀나갔고, 너르게 다다르는 세계로 점차 나아갔다. 그리고 이제는 이름 석자만으로도 존재감이 확실한 대체불가능한 배우가 됐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언어의 그릇에 걸맞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선사하는 배우라고 할까.
“저는 한 번도 제 길을 의심해본 적 없어요. 배우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딱히 고민도 없었어요. 그만큼 길게 봤고요. 딱히 조급한 마음도 들지 않았어요. 어차피 계속 연기할 거였으니까요.” 누구나 그럴듯한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살아남는 말이란 모두 증명한 삶을 발판 삼아 구전되는 법이다. 흥미로운 건 오정세의 연기가 좀처럼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하다는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나 <스토브리그>의 권경민,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상태, <악귀>의 염해상, <스위트홈>의 임 박사 등 최근 몇 년 사이 오정세가 연기한 캐릭터를 모아놓고 보면 하나하나 다른 면면의 다면체 도형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덕분에 이제 오정세가 새로운 작품에 출연할 때 ‘기대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사실 처음에는 공중에 붕 뜬 느낌이었죠. 이름부터 ‘어흥’이잖아요. 이런 이름이 어디 있어요.(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인물들이 땅을 밟고 있더라고요. 연기하다 보니 현실감이 느껴졌어요. 그때 알았죠. 아, 다들 자기가 맡은 인물이 됐구나.” <미스터 플랑크톤>에서 오정세가 연기한 인물은 이름부터 심상찮은 ‘어흥’이다. 유서 깊은 종갓집 가문의 18대 종손 5대 독자다. “어흥이는 다 처음이더라고요. 사랑에 빠진 것도, 엄마의 말을 거역하고 혼자 떠나는 것도 다 처음이에요. 그래서 참 순수하게 느껴졌어요. 처음으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어흥이는 ‘순수’와 ‘처음’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인물 같아요.”
퍼뜩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만약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면? “공기나 바람? 주변에 늘 있지만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잖아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까.”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마치 세상에 없던 것을 처음 본 기분? “처음으로 같이 작품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니까요. 만약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 거예요.” 오정세에 대해 우도환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둘도 없는 단 하나의 배우이자 사람.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오정세로 다다르게 만든 힘 아닐까,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