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4년차 경제부 기자다. 지난 2017년 3월 인턴으로 작은 온라인 매체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뒤 만 3년 9개월째에 접어들었다. 4개월차 되던 달부터 단순한 기업 보도자료를 기사화한 글 말고 직접 취재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직접 취재해 확보한 내용을 나만의 문체로 담은 기사가 1000꼭지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기사는 시, 소설 같은 문학 작품과 비교할 때 결 다르지만 일부 공통점도 존재하는 글이다.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글쓴이를 창작의 고통에 빠지게 만드는 점이다. 언론계에 몸담기 전 예상했던 것과 달리 기자는 기사로 이슈를 만들 수 있는지 여부로 자신의 몸값을 평가받는다. 기자 각자 맡은 출입처에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참신한 주제를 글로 조리 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역량이 요구된다. 배타적인 정보인 특종을 발굴해 단독 기사를 쓰는 데 필요한 능력이나 운과는 다른 요구사항이다.
특종을 찾아내기는 당연히 어렵고, 평이한 정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다 유의미한 통찰을 얻어내기도 쉽지 않다. 혼자 새벽에 일어나 자료나 통계치 등을 뚫어져라 살펴보다 뭔가 하나 발견하더라도 이미 다른 선배 기자들이 선점해 기사화한 상황을 적잖게 마주했다. 이럴 때 마다 ‘네가 생각하는 건 남도 생각한다’는 출처 미상의 격언이 절망감과 함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새롭게 찾아낸 이슈인 줄 알고 데스크에 보고했다가 이미 기사화한 주제라는 점을 지적받고 깨달았을 땐 더욱 정신 차리기 힘들다.
나 자신이나 타인 각자의 기준에 부합한 글을 쓰지 못할 때 작문의 고통이 생기지만,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이 같은 고통 때문에 창작 활동을 그만둘 순 없다. 이 때부터 타성에 젖어 글을 쓴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니까, 명예를 지켜야 하니까, 그간 참고 해왔던 게 아까우니까. 성과는 미미하고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 슬럼프에 빠진다.
지난 11월 27일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래퍼 스윙스(왼쪽)와 프로듀서 코드 쿤스트가 대화하는 모습. 출처= 엠넷 공식 유튜브 계정 캡처
유명 음악 기획사 가운데 한 곳인 AOMG의 프로듀서인 코드 쿤스트와 또 다른 기획사 저스트 뮤직의 대표이자 래퍼인 스윙스도 창작자로서 비슷한 어려움을 최근 호소했다. 두 뮤지션은 방송에 출연해 나눈 대화를 들려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슬럼프를 극복할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두 뮤지션은 지난 11월 27일 음악 전문 공중파 채널 엠넷에서 방영한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했다. 스윙스는 쇼미더머니 참가 래퍼로서 프로듀서인 코드 쿤스트를 만나 창작 활동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스윙스는 “요즘 의무감, 책임감, 밥벌이, 인정 같은 요소들 때문에 음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드 쿤스트는 현재 스윙스의 심정과 비슷한 마음을 갖고 프로듀싱 활동에 임했던 과거 시절을 언급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코드 쿤스트는 ‘일단 무언가에 쫓기는 마음으로 작품을 쏟아내는 것’을 극복 방안으로 소개했다.
코드 쿤스트는 “쇼미더머니 시즌 777을 하기 전 음악이 질리던 시기가 있었는데 쇼미(쇼미더머니)가 그걸 다 깨줬다”며 “쇼미더머니 시즌 777에 프로듀서로 참가했을 때 너무 빨리 다양한 곡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맞춰 하다보니 다시 재밌어졌다”라고 말했다.
코드 쿤스트가 창작물을 단기간에 많이 털어내는 과정에서 어떻게 본업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은 당시 방영되지 않았다. 다만 코드 쿤스트가 마감 효과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라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곡을 만들어내 방송을 펑크내지 않고 음원을 배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성취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마감 효과는 주어진 일을 끝내야 하는 시한에 가까워질수록 일에 대한 능률이 향상되는 심리적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코드 쿤스트는 어쩌면 당시 좋은 음악으로 많은 청취자들에게 호평 받고 그간 쌓아온 명성을 유지하거나 드높여야 할 것이란 부담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느 일이 그렇듯 매번 내놓는 결과물로 성과를 내긴 어렵다. 본인이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결과에 실망하고 당혹스러웠을지 모른다. 다만 쇼미더머니 시즌 777이 매주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에게 일말의 성취감이 주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같은 성취감이 그의 창작활동에 긍정적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도 마찬가지다. 데스크의 눈을 속이든, 억지를 쓰든 여러가지 방법으로 발제를 고수한 뒤비문만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취재하고 있다. 내 기사의 내용이 이미 세상 어디엔가 나와 있을 것이라든지, 누군가에겐 뻔한 얘기일 것이란 생각은 마음 한 켠에 묻는다. 어쨌든 자기표절하지 않는 한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글이라는 심정이다.
그러다보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소재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기사에 녹여냄으로써 나만의 기사를 완성한다. 데스크는 내 기사를 검토한 끝에 최종 송출한다. 사실 진정한 성취감은 데스킹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송출됐을 때 얻을 수 있지만, 이 같은 상황 종결에서 발생하는 보람이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발제가 킬 됐을 땐 짧은 보도자료라도 기사화해 송출함으로써 오늘 할 일 가운데 하나를 해치웠다는 마음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이는 기자로서 직업 정신이나 사명감과는 별도로,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나와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성취감은 규모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어느 결과물에서든 성취감을 느낄 줄 안다면 심리적·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최소한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냈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내일 더 큰 일을 도모하고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명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