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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바인스 Oct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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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지 않으셔도

- 아버지, 저 그날 봤었어요.

끊어질 듯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부지런히 아버지의 뒤를 밟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 뭘 봐?
- 병원에 오셨었잖아요. 저, 봤어요.

아버진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는 뒤를 흘낏 돌아보실까 싶더니 이내 다시 빠른 걸음을 재촉하신다.
나와 산이는 아버지의 걸음에 맞춰 동시에

섰다, 걷다, 를 반복한다.


저 봤었어요. 아버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내가 기거하는 작은방의 문이 슬며시 열다.
어머니께서 나의 병세를 살피느라 오셨겠거니 했다.
내내 잠을 뒤척이며 선잠을 자고 있던 나는 어머니의 아침식사 준비라도 도울 생각으로 몸을 일으다.

- 자냐?

아버지?
굵고 낮은 목소리가
유독 고요하고 답답하게 가라앉은 실내공기를 선명하게 흔다.

- 아니요. 이제 일어나려고요.
- 춥다. 단단히 챙겨 입어라. 가자.
- 어딜요?

아버진 대답 대신 조용히 방문을 닫으다.
스무고개 같은 양반 같으니...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나 사이, 매번의 대화는 이런 싱거운 수수께끼 같은 형태로 끝이 나곤 했었다.

퇴원하면서 벗어 걸어 둔 패딩 하나를 입는 것으로 준비 끝.
나중에야 장갑이라도 하나 찾아 챙겨두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아침 식전의 가벼운 산책 정도를 상상하고 있다.

경주 안강의 어느 시골,
한창 겨울이 깊어가는 12월의 새벽 공기는
절로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해야 할 만큼 알싸했다.
굳이 따라나서겠다고 내 뒤를 따르는 산이를 말리지도 않았고, 멀리 가면 안 된다고, 식전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딱히 말리고 싶진 않다.

새벽을 풍성하게 채우는 그 모든 것들은 말려선 안되지.

마당 한가운데서
도대체 어디서 저런 촌스러운 걸 사셔 쓰셨을까 싶어 보이는 털모자를 눌러쓴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신다.

대문을 나서고,
바로 옆으로 이어진 과수원 입구를 들어서고,
과수원 농로를 끝까지 다다라야 보이는 좁은 오솔길로 들어서면서도 아버진 행선지를 말씀하지 않으셨고 산책이라고 하기엔 조금 서두르는 걸음으로 좁은 산길을 앞장서셨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산이가 내뿜는 하얀 입김이 뒤섞이는 기분 좋게 차가운 걸음이 꽤 오래 계속된다.

한기는 사라졌고 땀이 솟는다.
좁은 산길의 앞선 아버지의 낡은 등산화 뒤꿈치나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스무고개 같은 아버지

첫 번째 골절 수술을 마치고 난 어느 날.
무료한 마음에 겨우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려다보던 나의 눈에 낯익은 어깨를 가진 노구의 남자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 아버지...

경주에서 용케 여기까지 오셨나 싶은 마음.
아직 뵙고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두렵고 어색한 마음

이 두 가지 마음만으로도 아버지의 방문은 나에게 충분히 불편했다.

두 눈으로 아버지를 좇는다.
택시에서 내린 아버진 곧장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가까운 벤치를 찾아 끄트머리에 걸터앉으셨다.

담배.
내가 알기로 아버진 10년 전 가벼운 폐렴 증세를 보이시면서 평생 피워온 담배를 이미 끊으신 분이다.
어지간히도 깊은숨을 들이쉬시는지 숨의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깊은 숨을 쉬고 계셔던 것이리라.

아버진 그날,
병원 8층, 어딘가에 누워있을 아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시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잠깐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아 움츠러든 순간도 잠시.
아버지의 시력은 그 먼 곳에서 나를 알아보실 그것은 아니었다.

- 담배 냄새 풀풀 풍기면서 좀 전에 들어오셨다. 쯧쯧.

다음 수술 날짜를 알려드리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을 때도 난, 아버지가 병원에 다녀가셨단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상처가 컸다.
위로는 없었고,
삶이 무미해졌다.
출근하겠다고 옷을 챙겨 입은 채 하루를 꼬박 소파에 앉아 먼산의 산허리 어딘가만 응시하고 있었다.

- 아... 이제 좀 쉬고 싶은데...

나이 서른아홉의 아들은 그렇게 14층 아파트 베란다를 넘어 화단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곤두박질쳤고,
어느 병원에서 이틀을 꼬박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어야 했다.

아버진 그 날,
나에게 무어라 하시고 싶으셨을까?
아버지가 담배를 손가락에 두고 나를 향해 던지셨던 초점 없는 표정을 두고 생각하면, 참... 희한하기도 하지. 위로가 되고, 안식이 된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말없이 걷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PS

아버진 그날 자투리로 사두신 언덕 기슭의 작은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곳에 진달래도 심고, 소나무도 심어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싶다 하셨습니다.

작년 이맘때의 가을...
제가 한창 미국 여행을 마무리 짓고 있을 때 시작한 공사가
얼마 전에야 끝났습니다.
아들 알토란 같은 퇴직금을 뼈까지 싹싹 발라서 지은 집.

돈이 효자인지,
제가 효자인지 분간이 가질 않지만...
어쨌든 예쁘네요.
두 노인네들 없던 사랑도 퐁퐁 솟아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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