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만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다. 삐그덕 대는 주방 문짝을 고쳐보려고 경첩 몇 개 사 오던 읍내 버스 안에서 그 소식을 듣는다.
- 당뇨 합병증인데... 뭐 이것저것.
뭔가 탐탁하지 않은 재만의 목소리가 갈라져있다.
- 괜찮냐? - 응, 며칠 꼴 보기 싫은 인간들 하나하나 상대할 거 생각하면.... 좀 그러네.
그렇겠네. 재만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검은색 정장을 찾아 옷을 갈아입는 나에게 어머니가 묻는다. 누가 죽었냐? 재만이네 아버지라는 말씀만 드리고는 입을 닫는다. 분명 어쩌다 돌아가셨는지를 물으실 텐데 그건 좀 난감하다. 어머니가 당뇨를 앓고 계신다.
뒷마당에 차고에서 차를 꺼내 울산 방향으로 차를 몰아간다.
- 재만아...
장례식장은 아직 한산하다. 재만이 누이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이 입구에서 아는 척을 한다. 서울 있다더니, 빨리도 왔네. 긴 말이 오갈 것 같아 안녕하셨냐는 대꾸로 얼버무리며 부조를 건네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상주인 재만이가 보인다. 슬퍼 보이는 표정이라기보단 뭔가 각오가 된 단단한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안도의 표정이랄까. 고인이 된 아버지는 더 이상 재만이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울산 강남 국민학교 옆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작은 산기슭. 그곳에 있던 강남 고아원이 나와 재만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재만인 그곳에 버려졌었고, 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찢어지게 가난해져 버린 집안 형편 탓에 그곳에 맡겨졌다.
12살, 재만이가 먼저 그곳을 나갔다. 울산에서 가장 컸던 백화점 지하에서 푸드코트를 하시던 아버님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재만이를 입양했다.
다들 형편없이 낡았지만 이런 때를 위해 여벌로 세탁해둔 원복으로 갈아입고 복도에 줄지어 섰다. 앞으로 부모가 될지도 모르는 어른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해맑게 웃어야 했던 우리 중에, 가장 키가 컸던 재만이가 선택이 되었다.
- 입을 아, 하고 벌려 봐. - 얘, 괜찮네. 어디 아픈덴 없죠?
재만이는 울었었다. 아랑곳하지 않았던 원장은 기부받아야 돈 만을 생각하며 재만의 작은 등을 떠밀었고, 그는 이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검어 보였던 승용차의 딋좌석에 탄 채 우리를 떠나갔다. 재만인 그러는 내내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도 울었었다. 원장이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어금니를 아무리 앙다물어도 소리가 새어 나와 주먹도 함께 쥐어야 했다.
- 너도 얼른 저렇게 좋은 부모 만나서 여기 나가야지. - 너네 부모님들... 너 여기 맡기는 대신에 나한테 돈 받아간 거 모르지? 다신 안 올 거야.
재만일 다시 만난 건 고등학교 입학식. 한눈에 알아본 우리 둘은 다시 강남 고아원 시절의 형제가 되었고, 지금껏 그 시절을 차곡차곡 기억하는 중년이 되었다.
일단 밥부터 먹으라는 재만이, 일단 술부터 한잔하고 싶은 나. 문상객이 밀려올 시간이 안된 걸까, 너무 한산했던 탓에 둘의 헛헛한 목소리만 테이블 위에 가득하다.
- 끝나고 낚시나 갈까? - 좋지. 어디? - 감포.
때마침 찾아온 문상객을 맞으러 재만이 일어선다. 야, 내가 지금부터 하는 거 잘 봐 둬. 너도 남일 아닐 거 아냐, 라는 헛소리를 스스럼없이 하며 일어서는 재만의 무릎이 무거워 보인다. 밉진 않은데 섭섭한 소리다. 나는 부모님을 잃는다는 구체적인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 돌아가신 재만이의 어머닌 좋은 분이셨다 한다. 아버지의 계속되는 폭력을 인내로 감당하셨고, 재만이 대신 모진 발길질을 견디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사실 재만인 이 날을 기다렸었다. 언제까지고 저렇게 당당하고 힘이 넘치는지 두고 보라지, 라던 재만이가 생각했던 오늘은 어떤 심정일까. 아직까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법 상주 노릇을 하고 있다.
- 내려왔단 얘긴 들었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좋네?
무영 누나이다. 당연히 재만과 어디 닮은 구석 하나 없는데도 왠지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딸이 무슨 대학이냐며 극구 반대를 하는 아버지 탓에 본인이 직접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가며 머나먼 타지에서 유학을 견뎌낸 누나이다. 가끔 재만이와 싸울 때도 있지만 결국엔 재만이를 동생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줄도 아는... 이런 무영 누나에게 저 멀찍이서 부조금이 얼마 들었나 봉투를 슬쩍 열어보며 아쉬워하고 있는 매형은 누나와 무척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나와 재만의 공통된 생각이다.
곁에 온 줄도 몰랐던 누나의 질문에 숟가락을 들고 쓴 소주를 헹구려 육개장을 뜨려던 손을 멈췄다.
- 어, 그렇게 됐네.
누나는 작은 아버지와 큰 아버지네 식구들 오기 전에 자릴 피하란다. 나는 그냥 종훈이와 용욱이 기다렸다가 화장터까지 따라가겠다 했다. 하긴 재만이가 친구가 없어서 딱히 운구할 사람이 마땅찮다는 누나의 양보를 듣고 난 뒤에야 난 다시 잔을 채웠다.
몇 해 째 재만이네 집 안과 남보다 못한 지경으로 지내는 작은 아버지가 나타나고 곧이어 건장해 보이는 남자 몇을 대동한 유난히 작은 키의 큰 아버지가 오셨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바깥에서부터 한판 제대로 싸우셨던 모양이다. 두 분 다 낯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곧 난장판이 될 거라는 누나의 말은 얼마 되지 않아 테이블 두 개가 뒤집어 엎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현실이 되었다.
재만이 뛰쳐나오고 제수씨는 영후의 귀를 막은 채 감싸 안는다. 누나는 치마로 쏟아진 육개장 국물에 어안이 벙벙하고, 나는 또 결국 안주를 집었던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는다. 종훈이와 용욱이가 입구로 들어서다 놀란 눈으로 멈춰 섰고 누군지도 모를 문상객 몇 분이 구석진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근조, 동운 철강 아무개 대표의 화환을 든 꽃집 총각도 복도에 서서 상황을 몰라 눈만 여기저기 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