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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바인스 Oct 20. 2020

인사동에서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소개팅하란다.
안 하겠다고 했더니, 누구 맘대로 안 하냐고 반문한다. 지금 내가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는 나의 다음 수석연구원 보직을 물려줄 박 책임이다.

하아... 소개팅이라.
이 무슨 낯간지러운 표현이고 닭살 돋는 이벤트인지. 학창 시절에도 해본 적이 없는 그걸 나이 마흔 하고 여섯에... 해보기로 한다.

신분 확실하단다.
한국이 언제부터 신분제 사회가 된 건지 모를 일이다.
외모는 직접 판단하시고, 머리는 똑똑해서 둘이 한판 붙어도 절대 지지 않을 듯하단다.
내조는 수석님이 하셔야 할 듯하단다. 요리나 청소를 잘할 것 같진 않다나. 페미니즘적 사고를 가지진 않지만 어쨌든 내조는 내가 해야 할 듯하단다. 박 책임은 다 계획이 있구나.... 벌써 나의 재혼을 걱정하고 (자빠져) 있다.

내가 별 다른 질문이 없자 박 책임이 싱거워한다.

- 상대방 안 궁금해요?
- 궁금하지, 그런데 지금 좀 바빠.

박 책임이 일어나 내 방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던진 말.

- 그분이 알아요. 수석님 집에서 뛰어내린 거...

검지와 중지를 모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시늉을 한다. 저 자식이 진짜...

거절할 걸 그랬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주말 오후에 종로에 차를 가지고 나온다는 건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지하철을 선택한다. 더운 날씨 탓에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을까 하다가 재킷을 하나 더 걸치기로 한다. 누구도 알아차리진 못하겠지만 그게 나의 예의라 생각한다.

산이는 유치원에서 가평으로 소풍을 간다 했고, 저녁엔 유치원에서 재우기로 했다. 주말이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느낌.

인사동.
마흔여섯의 중년이 소개팅하기 딱 좋은 장소인가? 청담동, 가로수길도 있는데 왜 하필...이라는 생각에 혼자 키득거리면서 상상한다.

포마드 헤어스타일,
슬림 핏 청바지에,
심플한 티셔츠,
그리고 브랜드가 기억나지 않는 재킷의 중년이 부채나 도자기 따위가 전시된 기념품 가게의 창에 비친다. 웃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좀 덥다, 는 생각에 재킷을 벗어 한 손에 든다.
누굴까... 날 안다는 그분




신분은 확실했다.
저 양반 신분증을 나는 매일 아침 보고 있었던 때가 있었으니.
똑똑한 것도 맞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을 졸업했다고 들었다.
요리, 청소 그리고 내조?
그런 건 상상이 가지 않는 사람이다.

약속 장소인 인사동 골목 안쪽의 한옥집으로 들어서면서 만난 신지은 부장. 부서는 전략기획팀이지만 어쨌든 나의 입사동기이자, 지금껏 회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동기이다.
직감적으로 그녀가 오늘 나의 소개팅 상대라는 걸 바로 알아차린다.
둘은 식당 대문 앞에서 쭈뼛이 서서 차라리 웃어버린다.

- 신 부장이었구나.
- 응, 나야. 큭큭큭

월요일, 출근하면 박 책임부터 조져야겠다.




꽤 신경 쓴 옷차림이다.
베이지색 바탕에 부드러운 꽃무늬가 있는 민소매의 리넨 원피스. 신 부장이 치마를 입는 걸 본 건 지금이 처음이다. 어울린다는 공치사 대신 어색하다는 솔직함을 건넸더니 괜히 입었다면서 무릎 위의 치맛단을 손으로 자꾸만 끌어내린다. 결국 잘 어울린다는 공치사를 하고 나서야 그걸 멈췄다.

- 진짜지?

늦은 오후라 술과 함께 밥을 먹기로 한다. 두 사람 모두 차를 가져오지 않은 탓에 부담도 없다.
메뉴를 고를 필요도 없이 2인분 밥상이 정해져 있었고, 연잎으로 잘 싸인 먹기 번거로운 식사가 차려졌다. 소개팅하러 나온 남자답지 않게 깨끗이 밥상을 비운다. 회사에서 람께 어울려 점심 먹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느낌이다.

- 왜? 남겼네? 아까워서 내일 점심시간 때 생각날 텐데...

신 부장은 거의 먹질 않는다. 다만 밥상을 물리고 나온 술상의 주인공은 단연 신 부장. 술이 그리 세지 않은 나에 비해 신 부장의 주량은 거의 주신(酒神)에 가깝다. 프로젝트 킥오프 콘퍼런스에서 혼자 양주 두 병을 마시고 다음 날 신입사원들의 속풀이를 위해 라면을 끓였다는 전설이 있는 친구였으니.

- 라면이 아니라, 일회용 북엇국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너무 급하게 마신다는 생각에 손에서 대나무통을 빼앗는다. 따라 줄테니까 천천히 마시라는 나의 말에 그제야 잔을 손을 놓는다.
지는 노을 때문일까. 벌써 신 부장의 얼굴이 붉으스름하다.

- 좀 실망했지? 그렇지?
- 뭐가.
- 좀 어리고 빵빵한 애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 말해 뭐해.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에 제법 달끈하게 덤빈다. 야, 내가 나이가 좀 있어서 그렇지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라는 둥, 그렇게 안 봤는데 너도 남자라 이거냐는 둥,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취기 가득한 헛소리가 작렬된다.

- 다 죽었어!!! 이씨...




신 부장, 아니 지은이에게 물었다.

- 소개팅... 네가 하겠다고 한 거야? 아님 박 책임이?

그냥 웃더니 질문과는 상관없는 얘기를 한다. 평소 회사에서 듣던 지은이의 목소리 그대로인데 좀 힘없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말을 잇는다.

중학교 때 바람난 아빠, 그 탓에 지금껏 엄마와 단둘이 산다고 했다. 형제는 없느냐는 날에 두 살 많은 오빠가 있다고 한다.
교도소에 2년째 살고 있다고,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오토바이를 훔쳐서 소년원을 들락거리더니 결국은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 안에 있어야 한다고...

그 타이밍에 술을 한 잔 권했다.
빙긋이 웃더니, 남자가 술 따라주니까 좋다란다.

형편이 어려워 재수를 한 뒤 등록금을 벌어서 비로소 대학을 갈 수 있었고, 대학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집안의 가장 노릇을...

그 타이밍에 술을 한 잔 더 권했더니
식은 동태찌개 국물만 몇 술 뜬다.

소개팅인지, 입사동기 회식 인지도 모를 자리를 끝내고 자릴 일어선 시간이 늦은 밤 11시.
열대야라고 하더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는 골목을 걸을 수 있다.

말없이 팔짱을 끼던 지은이가 덕수궁 돌담길까지 걷자기에 그러자고 한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좋고... 오늘 만난 소개팅 상대가 마음에 드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곧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날 거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탓이었다. 지은이, 아니 신 부장의 가늠하기 힘든 깊은 슬픔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도 못한다.

PS :::
신 부장, 지은이는 그 후로 요리 아카데미를 다닌다나 어쩐다나... 뭐 그렇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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