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 흐림/눈보라
캠프1(2,600m)→짐 데포(3,300m)→캠프2(3,000m)
오전 11시 30분, 약간 늦은 출발로 또 하루의 미지로 발걸음을 시작한다.
어제 데포해 놓은 우리 짐이 간밤의 날씨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기분이 좋다.
하지만 연속되는 오름에 이젠 입에서 숨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3,300m 지점에 이르러서 경호를 보니 나보다 더 힘들어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먹구름이 일더니 날씨가 순식간에 변한다.
강한 바람과 눈을 동반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의 시야 확보도 어렵다.
걱정이다.
텐트를 구축할 위치도 안 되고 경호도 많이 지쳐있다.
우선은 이곳에 짐을 데포하고 지나오면서 혹시나 하여 눈여겨 봐둔 야영지로 하산을 서두른다.
그토록 힘 좋던 경호가 원정의 첫 경험을 혹독하게 치르면서 움찔한 것 같다.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날씨, 어렵사리 텐트 구축을 마치니 한밤중, 오후 11시 30분이다.
12시간을 꼬박 운행한 것이다.
피곤에 지친 몸을 침낭에 밀어 넣으니 안심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폭설은 계속, 치워고 치워도 텐트에 눈더미가 쌓이고 또 쌓인다.
나와 경호는 교대로 내 키 보다 더 높은 눈을 번갈아 가며 퍼 올려내느라 바빴다.
이럴 경우는 텐트보다 설동이 유리할까? 생각해본다.
폭설과 기온 급강하는 예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게으름은 죽음을 부른다
5월 23일 눈보라
캠프2(3,000m) 체류
간밤 폭설의 악몽이 오늘까지 계속된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눈을 치웠는지도 모르겠다.
텐트를 지키기 위해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는데, 오늘도 계속이라니.
체력보강과 분위기 전환을 위해 어렵게 지고 온 삼겹살을 구워 점심을 해결했다.
그 새 기온이 급격이 떨어져 텐트 밖 국립공원 깃발이 꽁꽁 얼어버렸다.
지금은 운행을 하는 것보다 쉬는게 낳을 것 같아 제설작업과 생리현상 행결 외에는 침낭을 벗어나지 않았다.
둘 만의 자그만 텐트공간, 잠 드는 둥 마는 둥, 지금 몇 시일까?
시체놀이가 따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시간 죽이기처럼 가만히 있는 것도 다반사란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많이 난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가족, 지금 한국은 완연한 봄 기운으로 얼마나 좋을까?
뒤척이며 생각하다 잠이 든 모양이다.
늦은 오후즈음 밖에서 한국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야! 여기 한국 국립공원 깃발이 있네?”
텐트 밖에 꽃아둔 깃발을 본 모양이다.
먼 이국땅에서 들리는 한국말이 반가워 나가보니 등반을 마친 부산 부경대팀이 눈발을 뚫고 내려가는 중이다.
마침 따뜻하게 끓여놓은 숭늉이 있어 나눠주고 상황을 물었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은 대전팀이 정상공격 후 실족하여 조난당했다가 19시간 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가 되었다는것.
대전팀은 지난 겨울 지리산 동계등반을 같이했기에, 사고 소식이 남 일 같지 않다.
이후 상황은 그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상황을 듣는 경호 얼굴에 긴장감이 돈다.
최소 인원에 불과한 두 명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마음이 내심 무겁다.
잠을 청하려 해도 밖이 훤하니 싱숭생숭하다.
대전팀은 3명이 한 팀, 부경대는 6명 이상인 것 같다.
부산여성대는 여성산악인 3명, 그리고 우리팀 2명, 이번 시즌에 매킨리를 오르는 한국 원정대다.
이들은 며칠 간격으로 우리팀보다 앞서 올랐고, 우리 팀이 가장 늦게 출발했다.
어깨의 짐이 무겁다고 버릴수 없고, 광활한 데날리 산군에 혼자인 모습을 누군가 찍었다.
5월 24일 맑음/눈
제2 캠프(3,000m)→제3 캠프(3,600m)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하늘이 조용하기만 하다.
어제 많은 눈이 와서 짐이 실린 눈썰매를 끌며 러셀(russel, 눈을 헤치며 전진하는 것)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
백야현상으로 종일 밝아서 서두를 것도 없었다.
그 때 텐트 밖으로 싹~싹~ 썰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뒤따르던 외국 원정대가가 앞질러 가더니 길을 열어주는 꼴이다.
아직 침낭에 있는 경호를 부랴부랴 일으켜 서둘러 텐트를 접고 운행을 시작한다.
앞서 지나간 썰매 자국에 눈이 쌓이면 도루묵이기에 조금이라도 쉽게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이틀 전 데포에 놓은 짐이 악천후에도 잘 있었다.
씩씩대며 오르고 올라 제3캠프에 도착했다.
텐트와 임시화장실 구축하니 반가운 손님이 내려 온다.
대전팀 김재현 선배였다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손수 물을 끓여 점심을 대접하며 상황을 들었다.
동상과 부상을 입은 대원은 기상이 좋아져서 헬기로 이송되고 두 사람은 도보로 철수하는 것이라고.
식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그들과 올라가는 우리, 마음이 교차됨을 느낀다.
성공여부를 떠나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갈수 있을까?
사고 없이 내려갈 수 있을까?
혹시나 아무도 못내려 간다면?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다.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니 당장이라도 따라 내려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아마도 경호는 나보다 더 갈망하겠지.
고소의 영향으로 눈이 퉁퉁 부었고 갈라진 입술은 더 괴롭다.
5월 25일 흐림/맑음/눈
제3 캠프(3,600m)→윈디코너(Windy Corner, 4,200m)→제3 캠프(3,600m)
윈디코너에 짐을 데포하려고 운행을 시작했다.
처음 맞딱뜨린 모터싸이클힐은 심한 경사가 길기도 길어 악명 높다.
설사면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고각 설사면으로 썰매를 끌어올리기가 많많치 않다.
가뿐 숨소리가 더 쌕쌕거린다.
마치 짐썰매가 못 간다고 버티는 느낌이다.
잠시 쉴 요량으로 멈춰서면 여지없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무게, 어느새 체력이 바닥났다.
저 아래에서 경호가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경호의 머리가 앞 설벽에 닿을 듯 말 듯 한 모습이 마치 기어오는 것 같다.
고생 고생, 어느 순간 완만한 경사지를 지났다.
모터싸이클힐 상단에 올라 선 것이다.
썰매가 미끌어 떨어지지 않도록 돌려 놓고 눈밭에 큰대 자로 누워버렸다.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보니 산 넘어 산이다.
멀리 윈티코너의 웅장한 절벽 아래로 깨알 같이 지나가는 등반대가 보인다.
문득 산사면 절벽의 눈사태가 걱정 된다.
우리도 오늘 저곳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야 저 썰매의 짐을 데포할 수 있다.
윈디코너 앞으로 몇 개의 거대한 크레바스가 있어서 뱀 또아리처럼 빙빙 둘러 올라가야 한다.
몇 번의 이동과 휴식을 반복하다가 거대한 윈디코너 벽 아래 섰다.
위를 보니 꼭대기가 마치 하늘을 뜷고 올라간 것 같다.
바람이 얼마나 심하게 불기에 윈디코너라고 불리우나?
절벽 상단에서 눈덩이 흘러내리면 바로 눈사태다.
빨리 벗어나는게 상책, 쉬는 시간 없이 벗어나려고 3시간을 내리 걸었다.
힘든 하루였다.
오늘은 고기가 먹고 싶다.
경호가 모터사이클 힐 상단을 올라 섯다. 이미 구름을 뚫고 천상을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