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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idaCoreana Apr 30. 2022

기다려야지. 내가 갈 때까지

스페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기 - #19 레스토랑 주문

제목을 쓰고 보니 무슨 애완견 교육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건 스페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스페인 레스토랑의 웨이터에게 같이 식사하러 갔던 우리 일행이 들었던 말이다. 어쩌면 인종 차별일 수도 있고, 어쩌면 문화 차이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그 사람과 우리의 다름이 부딪힌 케이스일 수도 있을 테지만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처음 저 말을 들은 후 약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나가볼까 한다.


처음 스페인에 왔을 때, 나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날카롭고, 스트레스에 절어 있고, 불평불만이 많은 그리고 많은 것을 경계하는 그런 사람. 그리고 똑같은 목적지를 가더라도 가장 빠른 길로 가장 최 단시간에 가고자 하는 빨리빨리를 추구하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 매번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한꺼번에 주면 되지 전체, 본식, 후식 이렇게 나눠서 띄엄띄엄 음식을 주는 것도 불만이었고, 주문하는데 몇 십분, 음식 먹는데 몇 시간 그리고 계산하는데 또 몇십 분씩 소요되는 이 나라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때의 내가 여유라고는 1도 없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스페인을 왔기 때문에 더 이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스페인 레스토랑은 참 느.렸.다.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도대체 언제까지?


느긋한 오후, 당시 어학원을 함께 다니던 다국적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학원 근처의 식당을 갔다. 자리가 있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2층에 원하는 곳 아무 곳이나 앉으라고 해서 앉았는데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흘러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2층에 음식을 서빙하는 웨이터에게 눈짓과 손짓(수업에서 배웠다. '여기요', '이모' 이런 것 말고 웨이터와 눈을 마주치며 웃던가 손짓을 살짝 하면 웨이터가 올 거라고 했다.)을 했고 그 사람이 분명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결국, 나보다 더 성격이 급하고, 무리 중 가장 스페인어를 잘하던 친구 한 명이 1층으로 내려가서 주문받으라고 전달하고 왔다.

그리고 얼마 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고, 점심을 모두 먹고 4시가 다 되어서 식당을 나왔는데 계산을 할 때 웨이터가 우리에게 한 말은 한국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말이었다.


웨이터: 아까 너희 중 한 사람이 내려와서 주문받으라고 이야기한 거지?

일행: 어. 우리가 20분 이상을 기다렸는데도 안 와서 내가 내려가서 주문받아달라고 하고 왔어.

웨이터: 여기서는 그렇게 하는 게 무례한 거야. 내가 어련히 주문받으러 갈 텐데 기다려야지.

일행: 너희가 주문을 안 받아서 기다리다가 가서 이야기한 거잖아.

웨이터: 그래도 기다렸어야지.


대강 적으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때 일행들은 속으로는 모두 무슨 이런 X같은 경우가 다 있나 하는 얼굴이었지만 모두 스페인어가 모국어가 아닌 각국의 학생들이었고 다들 나름 순둥순둥 해서 기분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컴플레인하지 않고 그냥 나왔었다. 그 후 그 식당은 다시 가지 않았지만...


이건 단적인 예이고 저렇게 말한 웨이터는 교육이 덜 된 직원이거나 우리를 외국인이라고 만만하게 봤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그 후 약 10년 정도 더 스페인에 살다보니 주문을 하기위해 10분 정도 기다리는 건 어느 레스토랑을 가던 그냥 기본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들어가자마자 주문받으러 오면 오히려 내 쪽에서 조금 있다가 와 줄래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주문도 한 번에 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보통 저녁이나 주말에 친구들과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식사보다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집중을 하는 것이다. 일단 친구와 만나서 근황 토크를 하면서 직원이 음료 주문을 받으러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음료 주문 후에는 또다시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메뉴를 보고 음식을 고른다. 그렇게 10-20분 동안 느긋하게 즐기면서 주문을 하는 것이다. 예전처럼 주문만 기다리거나 웨이터만 눈 빠지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느려 터졌다고 욕하던 시스템과 문화를 이젠 한껏 활용하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나 참 많이 변했구나'를 느낀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나중에 주문 받아줄래?라고 해도, 천천히 느긋하게 식사를 해도, 정말 관광지이고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 아닌 이상 그 어느 레스토랑의 사장도, 웨이터도 기분 나빠하거나 눈치 주지 않는 것이 스페인의 장점이기도 하다.


허기를 채우는 식사가 아닌 음식을 즐기는 식사


작년에 엄마가 스페인을 왔을 때 이곳저곳을 다니며 스페인 음식을 많이 먹었었다. 스페인이 처음인 엄마는 식사하는 내내 주변에 있으면서 음식은 괜찮은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보고, 음식을 다 먹으면 접시를 쏜살같이 치우거나 새 접시로 바꿔주는 웨이터 덕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한국에서 그릇을 치우는 것은 얼른 나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결국 엄마는 우리 빨리 먹고 나가라고 그릇을 저렇게 치우고 옆에 와서 자꾸 기웃 거리는 거니?라고 나에게 물었고 엄마의 물음에 처음 스페인에 왔던 내 모습이 생각나며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스페인 레스토랑 문화와 내가 겪었던 일련의 일화들을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스페인의 이름 있는 레스토랑의 나이 지긋하신 웨이터 분들일수록 그 분야에 전문가이고 자신들의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일을 한다고 한다. 예전에 스페인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그분들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집사(?)처럼 옆에서 서비스를 하고 손님들이 식사를 충분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며, 빈 접시가 테이블에 그대로 있거나 해산물과 같은 음식을 먹을 때 먹고 남은 음식물들이 테이블에 쌓여 있으면 그들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식사라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느긋하게 즐기는 행위로 인식하기에 천천히 주문을 받고 접시가 비면 치우고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수시로 물어보는 것이란다.


내가 살아온 문화와 다른 문화라서 모를 때는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거야? 왜 이렇게 느려 터진 거야?라고 생각을 했던 것들이 이곳에 살면서 이들의 문화와 삶을 느끼고, 그리고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점점 더 이해가 되었다. 아직도 타고난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라서 시간이 촉박하거나 배가 심하게 고픈데 식당에서 느긋하게 주문을 받을 때는 간혹 욱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달려가서 주문받으라고 이야기하거나 느려 터졌다고 욕하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강아지는 아니더라도 나... 스페인에 길들여진 건가? ㅎㅎㅎ


BY. 라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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