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마 Aug 29. 2021

알고 나니 더 아파와요

상처에게 이름 붙이기

"선생님,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응, 그래."

"선생님, 왜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그래요."

"...... 미안해. 뭐라고 그랬지?"


열 살 미누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교 시간이 겹친 어린이들이 우르르 학원에 몰려 분주할 때에도 미누만은 느긋하다. 개인 책꽂이에서 악보를 찾아오는데 몇 분, 피아노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고 악보를 펼치는데 몇 분, 허리를 세우고 손가락을 들어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까지 몇 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갔다면 우리 미누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내가 바쁘게 피아노 방을 돌며 레슨을 할 때도 미누는 크고 작은 일들로 자주 나를 찾아와 피아노방 앞에서 기다린다. 미누는 나의 맹렬한 레슨 세례를 받는 아이가 다음 곡 악보를 펼치기 전 말이 끊어진 틈새를 기다려 나에게 말을 건다.


"선생님, 이거....."

"으응?! 뭔데, 무슨 일이야?"

"아니, 내가 지금 뭐 말하려고 하는데 말을 가로막아서 까먹었잖아요."

"미안해. 생각나면 다시 얘기해 줄래?"

"여기가 아파요."


바쁜 시간에는 말을 걸면 일일이 다 반응하기가 어렵지만 '아파요'라는 말을 들으면 레슨이 올 스톱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아프면 안 된다. 어린이는 특히 더. 선생님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한 방 단어는 '안 해요', '싫어요', '힘들어요'따위가 아니다. 아파요, 한 마디면 게임 오버다.


"어디가 아픈데?"

"여기요. 종이에 베인 상처예요."


미누는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둘째 손가락을 펴 보인다. 네 개 손가락을 말아 쥔 주먹도 조그만데, 상처를 보여주려고 한껏 펼친 세 마디 손가락도 작디작아서,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머릿속으로 슬픈 생각을 쥐어 짜냈다. 어디? 눈앞에 내민 손가락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도 상처를 찾지 못하자, 미누가 베인 상처를 벌려서 보여준다. 여기요, 여기.


"아, 그렇게 상처를 벌리지 마. 아프잖아."

"선생님이 빨리 못 찾으니까 그렇죠."

"계속 만지지 말고. 덧난단 말이야."


종이에 손을 베이면 특히 더 아파. 종이를 만들 때 돌이랑 유리를 갈아 넣는대. 그래서 종이가 그냥 종이가 아니고, 날카로운 종이가 되는 거야. 나는 아픔을 잊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아는 정보를 줄줄 늘어놓았다. 내내 듣고 있던 미누는 가만히 말했다.


"피아노를 치는데요. 자꾸 어디가 아픈 거예요."

"그랬구나."

"어디가 아픈가 했더니 여기였어요."


이리저리 자기 손가락을 살펴보던 미누는 말했다.


"선생님, 진짜 이상한 게 있어요."

"뭔데?"

"어디인지 모를 때는 그냥 그랬는데요."

"응."

"상처 난 데가 여기인 걸 알고 나니까 더 아파와요."


, 어떡하니. 나는 또다시 가슴 깊숙이 복식 웃음이 터지려는 참으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 원래 그래. 어디가 다쳤는지 모를 때는 그게 별로 아프지가 않다? 그런데  여기가 다쳤다고 알게 되면 말이지, 거기가 갑자기  ,  배로 아파져.


"과학적인 거예요?"

"그건 아닐 거야. 근데, 어딘지 알고 나면 또 금방 나아."


미누는 다시 물끄러미 자기 손가락을 본다. 나는 물었다.


"혹시 너무 아파서 피아노 못 치겠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 여기인 거 알았으니까, 종이에 베인 것도 알았으니까, 이제 약 바르고 낫기만 하면 되겠다."

"네."

"그럼 이제 연습하러 갈까?"

"네."


미누는 개운해진 얼굴로 자신의 피아노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성격처럼 느긋한 피아노 연습 소리가 들린다.


상처에 이름 붙이기. 자기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생기는 얕고 깊은 상처들. 찢어지고 부러지고 멍들기 쉬운 연약한 어린이들의 몸. 비단 피부와 뼈에만 생기는 상처가 아니다. 어린이들의 연약한 몸처럼 어린이들의 마음도 자신이 알지 못한 사이에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시무룩해지는 이유. 눈물이 나는 이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이유.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다. 어디에 생겼는지 모르는 상처가 거슬리게 하고, 쿡쿡 찔러 아프게 한다. 아픈데 어딘지 모르겠으니까 답답하다. 소리를 지르고 싶고 발을 구르고 싶고 바닥에 드러눕고 싶어 진다. 이럴 때 그 상처가 어디에 생긴 건지, 왜 생긴 건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지를 말로 짚어주고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누군가 내 아픔에 공감해주고 날 위로해주면 약을 바르지 않고도 낫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던가.


부모님께 사랑받고 싶고,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마음에 조금씩 상처가 생기는 것 같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어린이들의 연약한 마음에는 큰 손상을 줄 것이다.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일단 어딘가를 다쳤다면 그곳을 정확히 바라보고 제대로 치료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왜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그래요,라고 핀잔을 주었던 미누는 손가락이 베인 상처보다 선생님의 경청하지 않는 태도가 더 아프지 않았을까.


충분히 연습 시간을 가진 후 이론 문제집을 풀기 전 미누에게 물었다.


"미누야, 이제 괜찮아?"

"뭐가요?"

"손 베인 거. 괜찮냐고."

"아, 이거요?"


피아노를 두드리던 미누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상처가 어느 위치인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상처를 누군가 걱정해주고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줄어들기도 한다.


응원하고 기다린다. 몸도 마음도 씩씩한 너를. 괜찮냐고 물었을 때 '뭐가요?'라고 되물을 때까지. 상처가 있었던 것조차 기억할 수 없을 때까지. 대단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았던 상처가 아무렇지 않아 질 때까지. 입 벌린 상처 속을 마음껏 들여다보고 엄살 피울 수 있기를. 쓰라림을 견디면서 계속 나아갈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전부 다 싫은 3반 선생님의 좋은 점 한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