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일기 1
미국에서 지낸 지 벌써 4개월이 넘어간다. 8월 초순 경 인천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고 비행기에서 조금 더 울고 워싱턴 공항에 도착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짐을 찾고 덜덜 떨면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잔뜩 긴장해 위축된 채로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었다.
한국에서 내가 가져온 짐은 대략 72KG이었는데 (줄이고 줄였는데도 이랬다.) 공항에서 짐을 찾을 때 캐리어가 너무 무거워서 몇 번이고 휘청거렸던 기억이 있다. 분명 미국에 오기 전에 힘을 기른답시고 피티도 받고 그랬지만 캐리어가 너무 무거워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헬스에서 제일 무거운 무게로 운동을 해본 것은 25kg이었는데 (그렇다 나는 힘이 없는 편이다.) 캐리어는 각각 30kg이었다. 그리고 등에는 12kg 정도 되는 큰 배낭을 메고 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교환학생 때 이 가방을 메고 주변국을 여행했는데 이 가방만 메면 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무게 중심을 잡기가 어렵고, 몸을 좌우로 틀면 주변 사람들을 자꾸 가방으로 치게 되고는 했다. 그 당시 친구와 농담 삼아 가방살인마라고 낄낄댔던 기억이 있다.) 카트에 캐리어를 쌓아도 짐이 너무 많아 배가 빵빵해진 캐리어들은 연신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낯선 환경이 너무 무서워서 장거리 비행을 마친 채 피곤에 찌들어있던 나는 종국에는 캐리어를 카트로 옮기는 것을 포기했었다.
우리 학교는 8월 말에 개강을 했는데, 개강을 하기 전까지 나는 계속 여기저기 아팠다. 사실 개강을 하고 나서도 아팠다. 물이 잘 안 맞는지 매일매일 배탈 나고 머리도 전례 없이 엄청 많이 빠지고.. 입주한 아파트는 가구가 하나도 없어서 침대부터 의자, 책상 등등 하나하나 내가 조립하며 채워나가야 했으며, 바깥 음식은 너무 짜거나 기름진데 비싸고,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은 들인 노력에 비해서 묘하게 맛이 없었다. 거리는 온통 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뿐이고, 주변은 집중해야 알아들을락 말락 하는 낯선 언어로 가득 차있는데 그 소음 속으로 직접 들어가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할 때면 내 형편없는 영어 실력에 스스로가 놀라며 나 자신이 바보 같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코로나 백신도 맞았었는데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열이 올라 뜨거운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던 것 같다.
온 친척을 통틀어서 가족 중에서 해외로 공부하러 나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다. 어렸을 때, 다양한 학자들의 책을 읽을 때면 나도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당 주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을 꿈꿔왔지만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보니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고 느껴진 적은 없었다. 미국 유학은 나에게는 그저 요원한 꿈같은 거였다. 사실 이번 봄에 합격 통지를 받고 미국행이 결정되었을 때 우리 가족에게 미국은 미지의 세계 그 자체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인터넷을 뒤져가며 어찌어찌 미국행을 준비했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은 나에게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고 학교의 개강과 함께 나는 전에 겪어 본 적 없던 수업량과 과제량의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어로 제대로 공부하는 게 처음이고 영어가 익숙한 편도 아니라 (교환학생 때는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공부를 안 했다. 교환학생 때 안 하던 운동 한다고 까불다가 크게 다쳐서 한 학기의 절반은 요양하고 한 학기의 절반은 여행 다녔더니 그대로 학기가 끝나서 F만 겨우 면했다..) 수업 내용이 온전하게 이해되지는 않았고 한국과는 다르게 수업시간에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토론에도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너무 스스로가 위축되는 날의 연속이었지만 그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해보고 이번 수업시간에는 용기 내서 의견도 내보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조금씩 노력하다 보니 어찌어찌 첫 두 달은 모든 과목에서 준수한 성적을 받았고 첫 학기를 보람찬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가 속한 단과대는 1년이 쿼터제로 운영되며 1년이 4학기로 구성되어있기에 첫 학기가 지난 후 쉴 틈 없이 2학기가 또 시작되었다. 오늘부로 2학기의 중간고사 시험 성적이 모두 나왔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부진하다. 1학기 때와 똑같이 열심히 한 것 같은데도 배우는 과목의 내용이 조금씩 어려워지니 시험을 보는데 문제의 뜻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 영어실력의 문제 같기도 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고 다짐했는데, 사실 뭘 더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험이 어렵길래 직감적으로 망한 것 같아서..'아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너무 게으름 부렸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지'하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열심히 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까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시험도 잘 봤던데 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한 번에 갑자기 잘할 수는 없으니까 하루하루 조금씩 더 나아지고 배우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공부 중이지만 그래도 잘하고 싶은데.. 오늘은 앞서가는 마음을 내가 어쩌지 못해 더 속상한 날인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눈 뜨자마자 오미크론 변이로 인해서 백신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에 입국하면 자가격리를 10일간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2주간 진행된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건대 또 2주씩 2주씩 그렇게 연장하지 않을까 싶다. 내년 여름 인턴십 때문에 한국 방문이 불투명한 나로서는 겨울 방학 때 잠시 한국을 방문하는 것만 기다리면서 몇 달을 지내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니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혹시라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게 될까 봐 너무 속상하다.
오늘은 뭔가 모든 것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날인 것 같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공부도 속상하고 코로나 상황도 너무 속상하다. 2학기 들어서 공부가 어려워서 운동도 잘 안 하고 자꾸 간식도 먹고 스트레스도 받았더니 역류성 식도염이 도져서 몸도 마음대로 안 따라주니 더욱더 속상하다. 사실 너무 속상한 마음에 공부도 잘 안 되어 이것저것 두서없이 적어 내려 갔는데 적다 보니 처음 적기 시작할 때의 울적한 마음이 조금 가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모든 게 어려운 건 아직 내가 크게 도약하기 이전에 힘을 모으는 그런 시기여서가 아닐까? 그냥 오늘도 계획했던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하루를 잘 마무리해야겠다.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되어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