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일기 9
박사 과정의 첫 학기는 무사히 지나갔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내 인생에 이렇게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막연하게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사실 불안한 시기라면 지금껏 많았다. 하지만, 늘 뚜렷한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하거나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인생에 어려웠던 기억을 제일 먼저 떠올려보자면 고 3 때 수능을 앞두고? 근데 사실 이땐 불안한데 안 불안했다. 그땐 친구들이랑 다 같이 준비하는 거였고, 주위를 둘러보면 다 나와 같은 걱정과 고민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즐겁기까지 해서 수능의 압박보다는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과 친구들과 하루하루 바보 같은 것에 즐거워했다.
그다음은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재수를 했을 때? 이때 정말 불안하고, 또 불안하고 하루하루 압박감이 컸다. 부모님한테 너무 죄송했고, 또 못하면 어떡하지 싶었고. 그래도 매일매일 서울로 함께 학원을 다니는 친구도 있고 성적은 안정적으로 잘 나오고, 많이 울적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수능 날은 정해져있으니 그저 그날을 위해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보내면 되는 거였다. 20년을 살면서 이렇게 까지 열심히 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어서 결과가 어찌 되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물론 잘 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대학교 생활은 즐거웠고, 뭘 하고 싶은지 알아본다며 이것저것 해본 결과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려 별다른 고민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다. 선택에 대한 막연함 불안감조차도 없었다.
첫 번째 석사 생활은 힘들었지만 즐겁기도 했고 보람차기도 했다. 이게 끝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석사 과정 중 첫 번째 박사 입시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불안했고 괴로운 시간이 많았지만 혼란스러운 적은 없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두 번째 석사 생활은 첫 유학 생활인 만큼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힘든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박사 진학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어 이번에도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큰 불안감은 있어도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뭘 하고 싶은 건지 몰라 혼란스러운 적은 없었다.
모든 문제는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항상 나는 무언갈 할 때, 그다음 단계로 향하는 목표가 확고했는데, 그다음 목표가 사라졌다. 궁금한 걸 공부하는 게 좋고, 연구해서 무언가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이 너무나 즐거워서 당연하게도 연구자를 꿈궈왔는데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막상 공부를 시작하자 졸업하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늘 당연하게 학계에 남아서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를 지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 길만이 나에게 유일한 길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박사로서 졸업을 하게 되면 그때는 독립된 연구자인데, 최소한 내가 공부한 분야는 내가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건데, 난 아직 이도 저도 아닌 사람 같고 내가 앞으로 박사과정 몇 년 한다고 성공적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연구를 한평생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편, 진로적 측면뿐만 아니라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도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이 증폭되었다. 나는 20대 후반인데 이렇게 그 어떤 경제적 기반도 없이 전문가가 된다는 미래만 바라보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그리고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데 이렇게 기약도 없이 장거리 연애를 지속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 삶은 미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조각조각 나뉘어서 흩어져 있는 것 같고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마음이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졸업하고 미국에서 살고 싶은지 한국에서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나는 결혼도 하고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그럼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정착이라는 걸 언제쯤 할 수 있는 걸까? 이번 겨울 방학 때, 아주 짧게 들른 한국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남자친구도 만나고 친구도 보고 하면서 마음은 즐거웠는데 또 너무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마음이 어딜 가도 편안하지가 않고 현재로서 내가 편안한 순간이란 하루하루 할 일을 불안함을 깔고 집중해서 해나가는 순간밖에는 없다.
이게 나만 이렇게 불안한 걸까?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면 다들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 건 매한가지던데 다들 열심히 멋지게 살아가는 걸 보면 대단하다. 나는 이걸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 걸까. 이십 대 후반을 겪은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견디면서 30대도 되고 40대도 되고 한 걸까. 그 나이가 되면 덜 혼란스러울까.
이번 겨울 나와 같은 시기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던 고등학교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 친구도 나 못지않게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알고 서로 굉장히 큰 위안이 되었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우리가 결론을 내렸던 것은 처음에 별생각 없이 유학 및 해외생활을 결정했을 때와 다르게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우리가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의 무게가 전과 다르게 너무 커져서 버겁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걸까.
무거운 선택 하나하나를 해가면서 그 선택의 결과를 견뎌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예전에는 삶이 버겁다는 것의 의미를 몰랐는데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