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May 12. 2024

함께여서 가능했던, 남덕유산 하이킹

“함께”일 때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은 내게 낡은 동기부여 명언이다.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낡아버린 명언이 된 이유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일 때 해낸 경험이 아주, 아주 오래전이기 때문이다.


스물 중반까지만 해도 팀플 과제니 뭐니 인위적으로라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모르는 게 많은 사회 초년생 때는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점점 직무가 익숙해지고, 사회생활에 노련미를 갖춘 연차로 접어들면서 ‘함께‘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은 챙겨야 할게 늘어난 부담스러운 상황일 뿐이었다. 책임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지금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만들지 않고 있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시작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 여겼다.


재작년에 한라산을 다녀오기 위해 동네 뒷산을 오르던 일과가 일상이 되었고, 한라산을 다녀온 후로도 청계산과 주변의 작은 산들을 찾았다. 작년 말, 이사를 하면서 동네 뒷산과 멀어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 산악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자는 나름의 다짐으로 올해 위시리스트에 ‘큰 산 등반‘을 적었다. 하지만 일과 상황에 치여 흘러가는 대로 흘러 어느덧 5월이 돼버리고 말았다.


한라산에 오를 수 있게 응원해 줬고 이사 온 뒤에는 러닝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이 활동들의 매력을 알려준 하늘이(@natural.sky.c)는, 두두부부(두 바퀴의 자전거와 두 다리의 하이킹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부부)로 알려진 코오롱스포츠 앰버서다. 그녀의 인스타에서 올해 솟솟하이킹 스케줄을 접했다. 전국 국립공원을 하이킹하는 솟솟하이킹은 코오롱스포츠에서 진행되는 솟솟클럽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솟솟클럽에서는 다양한 아웃도어 액티비티 세션을 제공하고 있다. 작년에 청계산 등산과 요가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솟솟HIYO청계(Hiking & Yoga) 수업을 들었을 때도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하늘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솟솟하이킹을 신청해 보았다.



5월은 덕유산. 생각보다 티켓팅이 치열했다. 신청이 하루 만에 마감되어 마음 졸이고 있다가,  출발하기 이틀 전에 난 취소표로 어렵게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려고 하니 일도 힘든데 그냥 주말에 쉴걸 그랬나, 덕유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중급자 코스를 무턱대고 신청한 건 아닌가, 낙오하지 않을까 온갖 걱정이 들었다. 물론 설레는 마음도 있었지만,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코스에 설렘은 금방 사라지고 ‘할 수 있을까’만 남았다.


초입부터 경사가 있었다. 2/3 지점을 오를 때 즘엔 포기하고 싶었으나 내려가기엔 너무 많이 올라왔다. 앞을 향해 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지만, 남덕유산 정상까지 1km 남았을 때부터는 고소공포증 하고도 싸워야 했다. 세 개의 능선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난간에 의지해 두 손과 두 발로 기어서 올라갔다. 헛웃음을 쏟아내면서, 러브버그를 내쫓으며, 힘겹게 올라가는데 스텝 중 한 분이 무서워하면서도 참 잘 올라간다며 긴장감을 풀어 주는 말을 건네어 왔다.


올라가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오르는 중이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순간 조금 울컥했다. 올해 개인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막막한 상황에서 나는 그저 매일을 살아갈 뿐이었다.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지금 의지해 올라가는 이런 난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땅에 시선을 떨구고 한발, 한발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데 스텝분이 말을 이어갔다. 자신도 처음 왔을 때 너무 무서웠는데, 몇 번 와보니 이만한 풍경도 없다며 잠깐 뒤를 돌아보라고. 정말 무서워서 정말 잠깐만 본 풍경이 지금 와서는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멋진 풍경이었다. 마치 하늘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함께 걸어 주셔서 덕분에 그 고비를 잘 넘겨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유산은 개인적으로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었다. 체력 안배를 잘 못한 탓도 있지만, 나는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걸 더 힘들어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일등으로 올라와서 꼴찌로 내려왔다. 나중에는 다리가 너무 떨려서 풀어진 신발 끈을 묶는데도 스텝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참 우스웠던 포인트가 너무 많았는데, 6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나니 볼품없는 나는 온데간데없고, 끝까지 완주한 기특한 자신만 남았다.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스텝들은 참여자들을 위해 아이스커피를 만들어주었다. 두 번째 트레일매직의 시간이었다. 트레일매직은 길 위에서 배고픈 하이커들을 위해 박스에 물이나 콜라, 간단한 음식을 놔주는 장거리 하이커들의 문화다. 이 날 스텝들은 참여자들을 위해 여분의 물과 간식, 등산 스틱은 물론 아이스커피를 만들어주기 위해 무거운 보온병을 두세 개씩 더 가방에 넣고 산을 올랐다. 그럼에도 힘든 내색 없이 참여자들을 챙겼고, 웃으며 말을 걸어주며, 때로는 가장 느린 걸음을 옆에서 함께 걸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두두부부의 양희종(@sontaneous_yang)님이 정상을 오르는 것만이 등산의 목표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한라산을 가고 싶다고 할 때 하늘이 내게 해준 말이기도 하다. 만약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정상만 생각해서 한라산을 쉽게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의 말에 용기와 지혜를 얻어 한라산 정산이 아닌 윗세오름 코스를 선택했고, 덕분에 한라산의 설산을 흠뻑 즐기고 왔다.


그러고 보니 덕유산 산행도 정상 등반이 목표가 아니었다. 모두 안전히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렇기에 “함께” 오르는 방법을 택해 이 자리에 모였다.  산행을 마치고 소감을 나누는데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못 했을 거라고. 더욱이 나는 뚜벅이다. 차가 없는 사람이 이런 국립산에 혼자 오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친구와 왔다고 해도 유명한 등산로가 있는 산이 아니고서야 길을 잃을 수 있고, 둘이서만 오른다면 조금만 힘들어도 내려가려는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완주의 기쁨을 함께 나눌 때, 단순한 성취감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1500m의 산을 올랐다는 자랑보다 고된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고 이겨냈는지, 그 순간을 아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기쁨, 그 자체에서 오는 우리들만 아는 만족감이 있었다. ‘함께’여서 좋았다고 말하며, ‘함께’하기에 다음의 산행을 또 한 번 기약한다는 말들. 유대감을 담은 눈인사를 받으며 불현듯 나는 정상에 오르기 전 난간에 기대어 오르다 울컥한 내가 생각났다.


내 인생의 목표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을까? 아니, 오히려 높은 정상은 무서웠다. 완주 그것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완주하는 게 인생의 목표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처럼 ‘함께’ 가야 한다.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함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동안 점점 할 수 있는 게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했지만,  올해 내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나의 지경을 넓혀 삶을 확장하게 하려는 것만 같고, 긴 인생을 좋은 기억으로 완주하려면, 이제는 ‘함께’ 일 때, ‘함께’여서 잘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솟솟하이킹은 좋은 시작이 된 듯하다. 이래서 사는 것을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산행에 비유 하나보다.


11월 태백산을 갈 무렵에 나는 얼마나 확장되어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