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햇볕 아래서 '덥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살짝 웃음이 났어. 또 하나의 계절을 살아내고, 지나 보내고 있다는 게 실감 나더라.
너는 오늘 누구에게, 어떤 상황과 모습으로 찾아갔을까.
어릴 때는 예고도 없이 찾아오던 네가 미웠던 거 같아. 증오스러울 만큼 미웠지. 네가 날씨도, 계절도, 시도, 때도 없이 아른 거릴 때면 나의 모든 초점은 너에게 맞춰졌으니까. 그 순간들이 오래도록 흑백의 무성영화(無聲映畵)처럼 각인되었거든. 스스로에게 그 장면의 서사, 내레이션, 작은 요소들의 의미와 색을 기억하고 찾아주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란다.
카메라 렌즈 너머의 피사체를 사랑하는 마음은 작품에 녹아들기에 숨길 수 없다는 말. 개인적으로 이 말을 믿는 편인데.. 죽음, 너를 렌즈 너머로 6년 가까이 이리저리 바라봐온 나이지만 앞으로도 '사랑'만큼은 오롯이 담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그려오고 앞으로도 그려 갈 너를 담은 영상 속 한 프레임, 사진 속 한 픽셀, 그림의 붓질 한 번, 글의 한 문장에서 일순간이라도 누군가 '사랑'을 느낀다면 그건 '애증(愛憎)'의 한 파편이지 않을까?
부디 네가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기를.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스스로에게, 누군가에게 표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름 고된 시간을 보냈거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너를 마주할 때면 마음 한편에서 파도가 일렁여. 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는 나날이지만 단 하루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너라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그런 너로 인해 미친 듯이 화가 날 때도, 소리 내어 울 때도, 살포시 미소 지을 때도, 텅 빈 공허함에 초점을 놓아버릴 때도, 허공을 노려보며 원망할 때도, 한없이 감사할 때도, 무력함에 한 숨조차 버거울 때도, 참을 수 없이 기쁠 때도.. 결국 나는 나고 너는 너니까.
그래도 너를 그려내는 나의 작업 속에서 편안함, 자유로움, 즐거움, 희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 나는 그게 참 신기하고 신비로워. 죽음이라는 피사체를 정성스럽고 조심스레, 소중하고 의미 있게 바라보려는 소리 없는 마음을 느껴주는 한 명 한 명이 기적 같기도 해서.
최근에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어.
이론 수업도 듣고, 마네킹 실습도 하고, 한강 성심병원 장례식장에 현장실습도 다녀왔어. 솔직히 고백하자면 장례식장에서 첫 시신을 마주하기 전까지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해. <늘 '엄마'라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마주해 온 내가, 너를 직접적으로 마주했을 때 견뎌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나는 죽음을 그리는 퍼플아티스트라고, 예술에 죽음을 담는 다원예술가라고 스스로를 말해갈 수 있을까?>
감사하게도 더 단단하고 분명한 마음으로 자신을 '죽음을 그리는, 퍼플아티스트'라고, '예술에 죽음을 담는, 다원예술가'라고 표현하며 성장해갈 수 있겠더라. 나는 그렇게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겠더라.
내가 처음으로 나에게 있어 '너의 의미'라며 설명했던 표현을 너는 기억할까? '한 손에는 '행복'이라는 친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삶'이라는 친구의 손을 잡은 채.. 내가 준비가 되어있던 되어있지 않던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오는 친구'였다 말했었는데.. 그 후에도 나는 나에게 있어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정의 내려주었던 거 같네.
지금 나에게 너는 '모든 것을 꿰뚫는 단 하나의 평범함'이자 '홀로또함께 품을 북극성'이야.
길잡이가 되어 주는 나의 별이자, 나의 친구이자, 나의 중심이자, 가장 평범한 나의 죽음아.
앞으로도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누군가에게 말해갈 테니 너는 지금처럼만, 내가 길을 잃더라도 다시 너를 보며 다음 걸음을 내디뎌 갈 수 있도록 빛을 내어주다가 때가 되면 서로를 기꺼이 품어주기를.. 우리가 서로를 기꺼이 품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그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