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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Jul 28. 2021

전 세계의 관심은 아니더라도

전역했습니다!

전역 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이었다. 낯선 환경에 고립되어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 나아가는 것이 마치 군대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뜨자면, 주인공인 마크 와트니가 화성에서 체류한 기간은 대략 십팔 개월이다. 이는 나의 군 복무 기간과도 얼추 맞아떨어지는데, 이 기막힌 우연의 중력은 나의 손가락을 플레이 버튼으로 끌어당겼다.


  홀로 화성에 남겨진 마크는 살아남기 위해 기지를 보수하고, 식수를 만들고, 감자를 재배한다. 그가 이처럼 생존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화성에 올 때 가져왔던 초기 물자와 식물학자로서의 배경이었다. <마션>과 군대 사이에 놀라운 유착을 발견한 나에게 영화가 끝나고 다음 자문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되새겨보자. 나는 무엇으로 십팔 개월을 건너왔을까.


  훈련소 시절의 일이다. 입소 삼일 차에 훈련소장의 강연이 있었다. 벌써 십팔 개월 전의 일이고, 강연의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강연 직전에 틀어준 아이즈원의 뮤직비디오와 '군대는 인생이라는 행군 중에 갖는 휴식'이라고 했던 투스타의 우렁찬 목소리는 분명히 기억한다. 골자는 군장을 고쳐 매고 목을 축이며, 고된 행군을 준비하는 휴식 시간처럼, 군대 또한 잘만 활용하면 훗날의 인생을 정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얘기를 들은 나는 '과연, 맞는 말이야.' 하고 태평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반성했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뭐야, 성공한 사람이 하는 흔한 얘기잖아.' 하며 툴툴거렸다. 당시에는 그런 진부한 말보다, 삼 분 남짓한 아이돌 가수의 노랫말이 남은 군 생활을 견뎌낼 더욱 큰 원동력으로 다가왔다(하지만 아이즈원의 계약은 나의 군 생활이 끝나기 전에 끝나버렸다…).


  몇 주 후에 나는 자대 배치를 받았다. 동기들과 유유자적 생활하던 훈련소와는 달리 자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무전 용어를 외우고 근무를 숙지하는 것만으로도 몇 주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십여 명의 선임이 자아내는 분위기 또한 나를 압도하며 시간에 속력을 더했다. 하지만 근무와 생활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영역이었고, 대신 전혀 새로운 불안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고압적인 선임이나 사회에 나갈 수 없는 답답함이 아니었다. 전역 이후 나의 모습이 이전과 똑같을까 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오는 날에는 특히 그랬다. 누군가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누군가는 전시회를 열었으며, 누군가는 장학생이 되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차근히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나도 주어진 역할에 성실히 임하고 있었지만…, 나와 그들이 사는 세계가 지구와 화성만큼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남은 시간은 가능한 생산적으로 보내자고 다짐했다. 몇 주에 걸쳐 생활 패턴을 만들었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유지했다. 몇 가지 건설적인 목표도 세우고 이를 하나둘씩 성취했다. 밑거름이 된 것은 다름 아닌 훈련소에서 들었던 '흔한 얘기'와 영화학도로서의 배경이었다. 되돌아보면 전입 초반과 말년의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매 순간 아주 사소한 경험이라도 가치로 치환하기 위해 발버둥 쳤고, 힘이 닿는 한 살갗을 스치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이런 군 생활의 결과를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로 기록했다. 2020년 3월 18일부터 이듬해인 2021년 7월 20일 사이에 나는 매일 1시간 이상의 규칙적인 웨이트 운동을 했고, 14킬로의 체중을 줄였고, 1권의 책을 출판했고, 4편의 작품을 지면에 실었고, 305편의 영화를 보았고, 102권의 책을 읽었고, 11개의 시리즈물을 보았고, 5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모든 것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근무를 했다.


  근무하며 스쳐 간 감정과 생각을 전부 기술하기에는 허락된 페이지가 더없이 부족하다. 실로 다양한 일이 많았다. 차마 이곳에는 풀 수 없고, 소주 한 병 반쯤은 먹어야 겨우 털어놓을 수 있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전역한 지 며칠이나 지난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저 함께 근무를 나간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삼삼한 순간들이다. 눈 앞에 펼쳐진 다채로운 서울의 민낯은 그 순간에 짭조름한 양념을 가미하고, 찬연한 계절의 동작은 짜릿한 향신료를 흩뿌린다.


  소재를 불문하고 나는 늙은 성직자처럼 다양한 인생의 편린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훗날 창작을 하는 순간에서는 수백 편의 영화와 책 보다 훨씬 더 막대한 가치를 발휘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십팔 개월 동안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스치고 쌓인 감정과 생각이 거친 세상을 견뎌내는 훌륭한 밑거름이 되리라고 내심 기대해본다.


  다시 <마션> 이야기로. 마크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전 세계는 그의 귀환을 기다린다. 비록 전 세계의 관심은 아니더라도, 생각 이상으로 나의 안녕을 묻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전역은 너무 멀었고, 휴가는 한계가 있었으며, 면회 또한 항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을 모두 만난다는 것은 탈영하거나 <점퍼>의 데이비드 라이스가 되는 게 아니라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이 텍스트를 빌어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놓친 것보다 붙잡은 것이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십 대에 제가 해야 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마음속에서 존경하던 경찰관으로 살아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쌓아온 것을 전부 내어줘도 바꿀 수 없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따로 적지 않아도 알지?). 멍하니 고개를 들면 고마운 이들의 얼굴이 오월의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릅니다. 한눈팔면 흩어질까, 그곳에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두겠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복무했던 국회경비대 화장실에는 소변기 하나하나마다 격언이 적혀 있다. 그중 넬슨 만델라의 문장 하나가 비수보다 날카롭게 내 가슴속을 후벼 들었다.


자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려면 변하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2020년 3월 18일 ~ 2020년 7월 31일, 정부서울청사경비대 1소대

2020년 7월 31일 ~ 2020년 12월 17일, 국회경비대 3소대

2020년 12월 17일 ~ 2021년 7월 20일, 국회경비대 본부소대(치안상황실)


전역 전에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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