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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기획 Sep 18. 2021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양양청년협동조합이사장 김석기 님 인터뷰


김석기 양양청년협동조합 이사장을 알게 된 건 2년 전이다.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내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안 것이다. 인상적인 드로잉 작업을 하는 사람, 아내와 함께 비치마켓에서 그림엽서를 만드는 사람, 부부를 꼭 닮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3월 내가 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연락을 했다. 센터의 로고 작업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사정상 로고 작업은 석기 님과 진행하지 못했지만, 그게 인연이 되어 센터 사무실이나 양양청년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게 석기 님이 반가운 분인 건 그도 서울에서 AE와 마케터로 일했기 때문이다. 광고회사에서 일했다고 하면 간판 디자이너를 떠올리는 양양에서는 AE가 무엇인지, 마케팅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석기 님은 서울에서 광고대행사 AE, 대학내일 마케팅팀 마케터, 네파 브랜드 마케팅팀 마케터로 일했다. 35살에 서울의 직장을 그만둔 뒤 부모님이 계신 양양으로 왔다. 양양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연주 님을 만나 결혼을 하고, 딸 조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기도 했고, 관광두레 PD와 산림일자리발전소 그루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올해는 함께 고민해 온 동료들과 함께 양양청년협동조합을 시작해서 양양군의 관광 굿즈를 제작하거나 보드파크의 벽화 작업을 하거나 폐서핑보드를 활용해 리사이클링 제품을 만드는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양양청년협동조합 동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집 <양양에 살러 왔는데요>를 냈다. 그는 책에서 양양에 온 계기에 대해 “일단 도망친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네요”라고 답했다. 10년 차 직장인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서 이곳에 온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탈서울, 지방행에 대해 특별한 계기가 있을 거라고 짐작해요. 유학을 간다거나 해외로 가는 게 아니라 지역으로 간다고 하면 엄청난 뜻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하죠. 그런데 막상 실행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석기 님은 책에 쓰신 내용으로는 양양에 오신 계기에 대해 ‘도망쳤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김석기 :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나는 확실하게 도망쳤다. 떠나올 당시에는 이걸 인정하는 게 두려웠어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저도 제 마음을 잘 못 봤어요. 친구들이나 회사 팀장님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까 그건 아니었어요. 


그때가 몇 살이었나요?

김석기 : 35살이었어요. 출근을 하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회사에 가서 욕을 먹을까 봐. 제가 당시 네파에서 일을 했는데 직급이 차석이었어요. 다음에는 팀장급으로 진급을 해야 할 텐데. 제가 너무 일을 모르는 거예요. TV 광고나 PR 같은 다른 파트들을 잘 알아야 하고, 차석이면 보고서를 상무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너무 부담스러운 거예요. 저는 주로 프로모션 파트의 일을 했기 때문에. 제가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시작하기 했지만 TVCF의 PM까지 못 갔어요. 제 기준에서 AE로서 입봉은 50억 이상 예산의 온에어(On-Air)를 집행하는 건데, 그걸 못 하고 대학내일로 옮겨서 프로모션 일을 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꼰대인 거죠. 프로모션이나 온라인 마케팅 대행사는 갑을병정 중에 병이라고 생각한 거죠. 메이저 광고대행사에 못 들어간 것에 대한 쪽팔림이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이었어요?

김석기 : 친구들은 연차 5년 넘으면 인하우스 광고회사에 들어가고 이를테면 제일기획 같은 곳에 들어가는데 나는 BTL, 프로모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쪽팔림. 자신감이 없었던 거예요. 지금은 경계가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ATL, BTL로 굳이 나누어 구분을 했고, BTL이 ATL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이 낮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존재했었죠.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는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갑(광고주)으로 가자 생각해서 네파로 간 거예요. 그런데 정작 저는 ATL도 잘 모르고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는 게 약점으로 남아 있었어요. 차석이 돼서 상무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시점인데 너무 부담스러운 거죠. ‘나는 이거 잘 못 해, 모르는 건데 어쩌지, 들킬까 봐 두렵고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구나. 쪽팔리기 전에 튀자!’ 이런 생각이었어요. 


서울을 떠났다고 하기보다 그 일에서 도망친다는 게 더 컸네요.

김석기 : 당시에는 ‘나는 마케팅과 맞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컸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못하는 것 같고, 나랑은 안 맞는 것 같고. 업에 대한 고민이 누구나 있잖아요. 하지만 즐겁고 재밌고 더 하고 싶어야 하는데 계속 무섭고 두렵고 숨고 싶은 거예요. 특히 내가 똑똑하지 않다는 게 제일 컸어요. AE는 항상 스마트하게 얘기해야 하고 기획서도 그럴싸하게 써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죠. 책 많이 읽어서 글도 잘 쓰고 기획서에 도식화도 잘하는 사람을 보면서 자꾸 움츠러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본질적인 기획 전략이 아니라 외형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기획서 디자인 같은 거죠. 당시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제 나이에 제 레벨이 너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죠.


그렇게 도망친 곳이 양양이었던 건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곳이었기 때문인데 이게 양가적인 면이 있잖아요. 부모님께서 계셔서 거주하고 의지할 곳이 마련된 반면, 그 떳떳하지 않은 마음을 부모님 앞에서 밝히기 어렵잖아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면 “왜 왔니?”라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지만 부모님은 다르니까.

김석기 : 다행히 부모님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별달리 말씀을 하지 않으세요.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혼자 살았거든요. 내버려 둬도 큰 사고를 안 치니까 믿어주시는 거죠. 물론 서울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양양으로 왔을 때 의아해하긴 했죠. 그리고 되게 미안해하셨어요. 아버지가 제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평생 동안 한 번 하셨거든요. 제가 대학에 갈 때 집안이 망한 정도는 아닌데 등록금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버지가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의원 생활을 하시면서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있던 집도 다 없어지고. 힘들었죠. 학교를 다니면서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제가 벌어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지역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거나 직장을 구한 사람들은 주거비나 생활비부터 걱정이죠.

김석기 : 서울에서 사는 동안 내내 집을 제대로 못 구하고 살았거든요.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는데 32살쯤에 주위 친구들이 부모 도움을 받는 걸 보니 좀 다르더라고요. 친구가 독립을 하는데 집을 부모님이 해줬대요. 부모님께 미안해하면서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꼴사나워 보이는 거예요. 어머니는 집 보증금이라도 해주지 못 한 걸 많이 미안해하시더라고요. 


부모님께서 계신 곳, 고향이긴 하지만 굉장히 작은 시골 마을인데 돌아오기로 결정했을 때 부담은 없었나요? 시골 어른들께서는 자식이 서울 가면 다 잘 살 줄 알았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길 원했다는 게 아니라 그럭저럭 잘 살 줄 아신 거죠.

김석기 : 무난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시죠. 그런데 그 무난함이 엄청나게 힘든 거잖아요. 서울에서 평범한 아파트에 살면서 결혼해서 아이 키우면서 사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자기 자식이 힘들 게 살 거라고 생각을 못 하시죠.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으로서 서울에 살다가 양양에 왔는데 서울에서 생활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김석기 : 서울에서 제일 좋았던 건 문화죠. 세상을 확실히 더 넓게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니까. 특히 저는 일 자체가 광고업이었으니까 네트워크가 넓어지잖아요. 다양한 직군의 클라이언트를 만나게 되고, 우리나라의 하이 컬처부터 전문적인 분야까지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인맥을 넓힌 게 제일 좋았어요. 요즘은 SNS가 있어서 서울과 지역의 문화 차이가 그렇게 크진 않은데 제가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유행하면 세 달 뒤에 강릉에서 유행하고 빠르면 한 달 뒤에 유행하는 거리상의 장벽이 있었어요. 그런 게 요즘은 없죠. 어렸을 때는 그 차이가 커서 서울에 처음 가보니 정말 별천지였어요. 촌놈이 서울 가서 대학로가 서울의 전부인 줄 알다가 강남 문화를 알고 나서는 또 정말 다르고, 강북과 강남의 차이를 알게 되고 강동과 강서의 차이도 알게 되고. 그런 게 되게 재미있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게 제일 좋았죠. 


반대로 서울을 떠나고 보니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김석기 : 아쉬운 건 바로 떠오르지 않네요.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물론 인터넷이 없었으면 되게 아쉬웠을 거예요. 여기에 고립되었다고 느낄 것 같고. 그런데 요즘은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정말 많잖아요. 서울에서 살 때보다 영역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AE로 일할 때는 SNS를 마음껏 하지 못 하잖아요. 광고주가 볼까 봐. 놀아도 티를 내면 안 되니까. (웃음) 여기서는 SNS도 마음껏 할 수 있고 더 확장된 것 같아요. 좁은 곳에서 살면서 고립될 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더 SNS나 블로그를 열심히 했는데 그걸 통해서 기회를 많이 얻었어요. 서울에서는 오히려 조직에 속해 있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었죠. 처음에 제 세상을 확장해준 건 서울이 맞는데 양양에 와서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어요. 모순적이긴 한데, 고립된 곳에 오니까 세상이 더 크게 보이더라고요. 


회사를 그만둔 뒤 바로 양양으로 오셨나요?

김석기 : 양양에 오기 전에 제주도를 2주 동안 걸었어요. 올레길이 아니라 그냥 걸었어요. 그때는 모든 세상의 기준이 다 싫어서 제주도에 가면 뭘 해야 하고, 올레길을 걸어야 하고, 이런 걸 의도적으로 피했어요. 하기 싫었어요. 처음에는 지도를 안 보고 걷다가 가다 보니까 올레길 지도가 있어서 하나 사봤어요. 걷다 보니까 웬만한 데는 다 올레길인 거예요. 그때 느꼈어요. 아, 올레길은 걸어본 사람이 만든 길이구나. 처음에는 반감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2주 동안 계속 걸었어요. 걷다가 다리가 아예 안 움직여서 처음으로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에 가본 거예요. ‘제주도 가면 게스트하우스’ 이런 공식이 싫었어요. 그런데 다리가 아파서. (웃음)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참 편하게들 사는구나’ 싶은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웃음)

김석기 : 물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원래 사람은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잖아요. 직장에 대한 고민을 듣다가 불쌍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어요. 게스트하우스에 8명 정도 있었거든요. 직종은 다 다른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사는 거지? 싫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싶었어요. 그런데 해결점이 없는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 그때부터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물었죠. 제가 도망친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는데 그걸 해결하는 게 서울에 다시 복귀해서 해외 MBA를 따는 건가? 그게 아닌 거예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평생 살 수 없을까?’ 그 물음을 안고 제주도에서 양양으로 왔죠.


양양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어요. 공공근로도 하셨다고요. 

김석기 : 양양에서 살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는데, 제주도에서 가진 생각이 이어져서 ‘왜 나는 양양에서 돈을 못 번다고 생각했을까?’라고 묻게 된 거죠.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정주영식 마인드가 박혔어요. “해 봤어?”라고 하는 거죠. (웃음) 모든 일에 핑계를 대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공근로를 한 거죠. 낙산에서 쓰레기 줍는 일도 했고, 요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어르신들 주간보호 갈 때 차량 이동도 하고. 공공근로라는 게 길에서 조끼 입고 이유 없이 쓰레기 줍는 어르신들 보신 적 있죠? 그게 어떻게 보면 시간 때우는 거죠. 아침에 가서 한 시간이면 끝나는데 그걸 6시간 동안 해야 해. ‘내가 직장을 계속 다녔으면 끝이 이런 건가?’ 싶은 거예요. 퇴직해서 자영업 하거나 돈 겨우 모아서 부동산 하나 사거나 공공근로를 하겠죠. 공공근로하는 어르신들도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아, 나이 들어서 시간을 때우려고 살면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하루를 진짜 빡세게 살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직업을 몇 가지를 할 수 있을까? 왜 한 우물을 끝까지 파야 하는 거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게스트하우스도 해본 거죠. 컨테이너 갖다 놓고 사무실도 만들었어요. 그런 모습을 브런치에 올렸는데 이슈가 되기 시작했어요. 그때 알았죠. 아, 사람들이 정말 이렇게 살지 않는구나.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죠. 안 될 이유를 생각하기가 더 쉬우니까.

김석기 : 저도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서울에서는. 회사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그냥 다니면서 고민할 수 있잖아 라고 하는데, 저는 그게 안 되니까 그만둔 거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예요. 다들 할 수 있는 것, 하지 않는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일을 구분을 못 하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양양에서는 집요하게 제가 하고 싶은 걸로 시작했어요. 게스트하우스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제대로 갖춰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거죠. 그동안 저를 옥죄고 있었던 서울에서의 기준을 버린 거죠. 일단 빨리 해보는 게 더 남는 장사인 거죠. 돈도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이게 제일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어요. 양양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지역에서 사는 게 대단한 일이고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지니까 다들 지역으로 못 가는 거예요. 모두가 서울을 벗어나 지역에 가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점점 더 못 가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라는 사람이 대단한 게 아니라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안 어려워요.”라고 쉽게 느껴지게 하는 게 제 사명이 된 것 같아요. 




지난해 말에 양양청년협동조합을 만들고 올해부터 열심히 활동 중이신데요. 새로운 분기점을 맞은 것처럼 보여요.

김석기 : 양양에 와서 4년이 넘어가면서 어느 하나에 방점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왔을 때는 양양에 대한 사명감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관광두레 PD로 일하면서 양양은 왜 이렇게 고립되어 있을까 싶더라고요. 서울 사람들도 생각이 고리타분했는데 여기는 더 심한 거죠.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들 방법을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걸 타개한 사람처럼 보였나 봐요. 어느 정도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양양청년협동조합을 시작한 거죠.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여서 하나둘 씩 해보는 거죠. ‘안 될 게 뭐가 있어?’라는 마음으로 해보는 거죠. 


양양군 관광 굿즈도 만들고 브랜딩 관련 작업도 하고 계시죠.

김석기 : 브랜드 마케팅이 두려워서 도망쳤지만 제가 생각보다 잘하더라고요.(웃음) 아무런 실력 없이 그 바닥에서 10년 동안 구른 건 아니라는 것, 잘할 수 있는 일이 기획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나름대로 로컬에 맞는 브랜딩 모델을 만들어보기 시작했어요. 그게 제가 만든 HCW PROCESS예요. 그림도 그리니까 BI 구축도 할 수 있고. 청년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도 하다 보니 다들 파트타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파트타임을 늘리면 되잖아요. 이런 걸 찾아가고 있어요. 저는 협동조합도 꼭 공동의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이고 유닛으로 활동을 하면 되죠. 양양청년협동조합은 양양이라는, 로컬이라는 제한을 두지 말고 사업군도 서울에 있는 걸 그대로 해보고 있어요. 이를테면 마케팅 분야죠. 서울에 있는 사업군이 로컬에 그대로 존재할 수 있고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저희가 만든 게 새로운 것들이 아니에요. 기존에 있는 건데 여기에 없는 거죠. 저는 로컬이라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부족한 것부터 만들어내는 사업만 해도 충분해요. 청년이 양양에 왔다고 해서 모두가 서피비치 같은 걸 할 수는 없잖아요. 빨래방, 키즈카페, 원룸, 독서실, 서점처럼 다들 있는데 우린 없는 것만 찾아도 할 게 넘쳐나는 거죠. 


처음 혼자 양양에 왔을 때와 지금 달라진 상황도 있으시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하면서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실 것 같아요. 

김석기 : 아이 문제가 거의 끝판왕이에요.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었고 두려움이 없었는데 아이가 태어난 게 제일 큰 챌린지예요. 아이에게도 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반반이죠. 우리가 오랫동안 받아왔던 교육이 있잖아요. 부모면 아이 대학 등록금 정도는 마련해줘야지, 기저귀 값은 벌어야지. 이런 걸 다 버리기로 했어요. 아이가 자라면서 강릉으로 가는 것도 생각한 건, 병원이 없어서죠.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양양애 병원을 지을 수는 없으니까요. 교육이 이유는 아니에요. 흔히 시골에 살면 애가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두려움이 제일 크거든요. 친구가 없을까 봐. 여기서 애 키우는 사람들 모두 그런 걱정이 있죠. 그래서 사람 많은 쪽으로 가려고 하는 건데. 저도 걱정되긴 하지만 그냥 엄마, 아빠가 잘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양양에도 어린이집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적게 태어나는 곳이니 어린이집 규모도 작은 편인가요?

김석기 : 확실히 작긴 하죠. 하지만 어디까지가 적정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이가 사회성을 기르는 데 친구가 몇 명이 필요한가? 5~7명 정도는 필요한가? 그런 자료가 없잖아요. 오히려 사람 많은 도시에서 왕따를 경험하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산촌으로 오는 아이들도 있고. 용의 꼬리가 될 것인가, 뱀의 머리가 될 것인가 묻는다면 저는 뱀의 머리가 되라는 쪽이거든요. 자존감을 지킬 수 있으면 큰 곳으로 가도 두려움을 갖지 않으니까, 아이가 독립심을 갖도록 교육하는 건 신경 쓰고 있어요. 사실 이건 모든 부모의 목표인데 막상 키우는 건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나라 부모들은 죽을 때까지 돌보잖아요. 저는 농담처럼 말하지만 중학생 시기까지 제가 돌보는 기점으로 보고 있어요. 술, 담배를 하든 남자 친구를 만나든 외박을 하든 고등학생부터는 알아서 하라는 거죠. 대신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하죠. 오히려 중학생 때까지는 진짜 가깝게 밀착해서 지내야 하고요. 그리고 제가 일을 하는 건 철저하게 저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생활비나 책임감도 있지만 자식을 위해서 산다는 건 아니에요. 좋아하는 일을 책임감 있게 하는 모습을 아이가 보면 좋겠어요. 


그렇죠. 아이가 자라는 동안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게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김석기 : 아이가 어리니까 자신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모순이라고 봐요. 물론 예전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서울에서 직장 다녔으면 저도 그렇게 살았겠죠. 아이 낳고 나서 1, 2년 동안은 힘들었어요. 아내가 어리고 직장 생활 경험이 없다 보니까 계속 제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일을 하루에 3시간도 못 했어요. 지금은 저도 아내도 하고 싶은 일들이 있고, 그 일들을 그저 열심히 즐겁게 해나가려고 해요. 그런 모습을 딸이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크지 않을까, 그게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온다면, 지금보다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서울을 떠날 생각인가요?

김석기 : 딱 좋은 시기에 떠났어요. 너무 일찍 와도 안 좋았을 거예요. 서울에서 제가 겪을 수 있는 고통,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다 겪었어요. 직장인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지나가는 차가 죽지 않을 만큼만 쳐줬으면 좋겠다, 한 2주만 입원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했죠. 제가 옥탑방에 살았는데 수도관이 터져서 한겨울에 보일러가 안 돌아가는 날이 있었어요. 새벽 6시에 버스를 타야 출근할 수 있었는데 새벽 2시에 퇴근해서 씻지도 못 하고, 너무 추워서 파카를 껴입고 버너에 물 끓여서 곁에 두고 잤어요. 그런데 출근할 때는 정장 입고 깔끔하게 미팅을 하고. 스물아홉 무렵이 제일 힘들었어요. 뭘 해도 안 되고. 그런 경험을 서울에서 했고, 극복해낸 것도 서울이었고, 다행히 밀도 있게 잘 살았다는 생각을 해요. 너무 모르지도 않고 너무 늙지도 않은 나이에 양양에 온 게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딱 좋았어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일본 드라마의 제목인데, 김석기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터뷰의 제목은 이걸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문장이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들 하지만, 내가 무엇으로부터 왜 도망치는가 물었을 때 답할 수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새로운 길이 시작되기도 한다. 김석기 님이 양양에서 시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은 그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이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청년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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