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투정이란 무엇인가
등원 전 둘째는 옷을 고르는데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새로운 옷이 매일매일 옷장에 걸려있다면, 쉽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옷이라는 재화는 한계가 있다. 한정적인 재화 안에서 골라야 한다. 매일 유치원을 가는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 맘에 드는 옷을 고르고 싶겠지만 7살 아이는 주어진 여건에서 골라야 한다. 4살 많은 형이 입던 옷을 물려 입거나, 가끔 사촌형들 옷을 받아 입기도 하고, 직접 마트에 가서 고른 옷도 있고, 아빠가 세일한다며 사다 놓은 옷들도 있다. 엄마 입장에선 옷이 없는 게 아니다. 충분히 많다고 생각한다. 가짓수가 많다고 해서 옷이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한때 나도 옷장문을 열 때마다 주렁주렁 걸려있는 옷들을 뒤로하고, 매번 입을 옷이 없다며 투정하면 20대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단출하게 산다. 청바지 몇 벌, 티셔츠 여러 벌, 두 개의 점퍼만 있다. 어차피 육아 중인 내게 옷은 많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옷에 대한 욕망이 소멸되기 직전인 상황. 그런데 이제 막 옷욕심이 넘쳐나기 시작한, 7살 남아에게 옷이란 다른 의미일 것 같다.
옷투정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는 왜 투정을 하는 걸까? 7살이 된 후 좋아하는 옷스타일이 바뀌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캐릭터가 있던 옷은 더 이상 입지 않는다. 한때 아이에게 전부였던 포켓몬들은 더 이상 옷장 밖으로 나올 일이 사라졌다. 공룡은 너무 시시해졌고, 그나마 입던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옷도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축구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스포츠 브랜드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손흥민 축구복,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복을 사달라고 한다. 손흥민 축구복은 빨간색으로 이미 하나 있다. 이제는 흰색으로 사달라고 한다. 메시 축구복은 사촌형에게 물려받았는데 이제는 입지 않는다.
'그럼 뭘 입겠다는 거니?'
속에서 부글부글한다. 겨우겨우 달래서 옷을 입혀 보낸다. 휠라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간다. 캡모자를 사달라고 몇 주 전부터 졸라대서 옷 말고 모자를 하나 사주기로 했다. 볕이 쨍해도 지금 있는 모자들은 다 쓰기 싫다고 하는 아이. 캡모자가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건 아이가 전보다 성숙해졌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입던 옷, 그냥 쓰던 모자가 아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고 싶은 나이가 벌써 된 것이다.
옷투정은 그렇다 쳐도 밥투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투정의 양상은 첫째와 둘째가 다르다. 둘 다 잘 먹는다. 단지 둘의 입맛이 극과 극이라는 것. 그래서 그 사이에서 매번 엄마는 요리하느라 허덕댄다는 것. 육식주의자 첫째는 고기만 있으면 잘 먹는다. 한식에 최적화된 입맛을 지닌 둘째는 밥과 채소반찬들이 있어야 잘 먹는다. 부추도 생으로 뜯어먹는다. 고기를 안 먹는 건 아니지만, 나물 반찬이 있으면 더 잘 먹는다. 어느 날, 식단이 한쪽으로(육식 또는 한식)으로 치중될 경우, 둘 중 한 명이 부실하게 먹게 된다. 첫째는 반찬이 없다는 말 대신 소금을 가져와 밥에 뿌려먹는다. 소금밥을 먹는다는 게 엄마 입장에선 속이 부글부글하다. 대신 약간의 매운맛이 느껴지면 못 먹는다. 치킨을 먹을 때 특히 그렇다. 웬만한 후라이드 치킨은 다 맵다고 한다. 그런데 첫째가 이번엔 후라이드로 먹자고 하면 둘 사이에 낀 나는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두 마리를 시킬 순 없고, 반반을 시키면 결국 후라이드만 남는다. 첫째는 후라이드를 시켜도 결국 양념으로 넘어온다. 그럼 그냥 양념치킨으로 통일하면 좋지만, 둘째가 또 시무룩하다. 양념이 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치킨집이어도 동일한 맵기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 차이를, 엄마 입장에선 미비하지만, 아이는 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잠투정. 엄마입장에선 애들이 빨리 자야 좋다. 내 시간도 좀 나고, 남은 집안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물론 나의 바람일 뿐이다. 첫째는 요새 늦게 잔다. 초등 고학년이 되니 달라졌다. 물론 전에도 호락호락하게 일찍 자던 아이는 아니다. 자기 전, 책도 읽어야 한다. 늦게 잔다. 11시가 넘어 잔다. 단, 둘째는 일찍 잔다. 루이후이 인형이 생긴 후 쉽게 잠든다. 잠잘 때 인형친구들과 함께 하니 편안하게 자는 것 같다. 잠투정이란 말은 사실 지금 아이들에게 맞는 표현 같진 않다. 잠이 고픈 건 오히려 엄마인 나이니까. 잠투정은 내가 더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잠이 줄었다. 깊게 못 잔다. 한 줌 빛줄기에도 꿈틀댄다. 달이 밝으면 밝은 대로, 해가 일찍 뜨면 일찍 뜨는 대로 나는 잠에서 깬다. 바스락대는 소리에도 움쭐한다. 잠투정은 오히려 내가 하는 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멜로디언을 사달라고 설거지하는 엄마 앞에서 투정을 부린 적 있다. 당시 멜로디언은 만 5천 원 정도. 고가의 엔젤 실로폰이 5천 원이었으니 영창이나 삼익 브랜드 멜로디언은 그야말로 당시 문방구에서 파는 악기 중 가장 비쌌다. 멜로디언만은 친구들에게 빌리기 싫었다. 친구가 입을 대고 분 호수에 내입을 갖다 댈 순 없었다. 엄마에게 이런 이유로 필요하다고 말하진 못했다. 그날 아침, 나는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멜로디언을 사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의 입이 닿지 않은 멜로디언이 필요했던 나는 결국 백기를 들어준 엄마에게 고마웠다. 그 뒤로 내가 중학생이 되고, 집에 있던 실로폰과 멜로디언은 이모의 딸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물려주고 물려받던 시절을 겼었다.
사실 살면서 뭐가 그렇게 투정할게 많은지 모르겠다. 투정도 받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라며 내 어린 시절을 반추해 본다. 아이들이 자기 의사표시를 하는 방식의 첫 시작이 투정일 테니까. 그 시작이라는 서막을 엄마가 잘 받아줘야 하는데 종종 욱하면서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 이런 상황을 남편에게 얘기하면서 욱하는 나를 보니 투정인 내가 더 부리는 것 같다는 반성도 하게 된다. 투정이란 적당해야 하는 법. 결국 아이들도 투정을 부리고, 결국 투쟁을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백기를 든다. 투정이란 애초에 어떤 상황에 대한 감정의 틀어짐이다. 틀어진 자신의 상태를 다시 교정할 수 있는 건 본인뿐. 아이들의 투정도 결국 기다리면 된다. 그 기다림을 참지 못해 목소리를 목이는 엄마가 더 문제일 수 있다. 투정은 성장 과정에서 보이는 미숙함일 테니까. 아이들은 아직 감정조절에 있어 미숙하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미숙한 엄마인 나도 시간이 필요하다. 투정이란 애초에 시간 속에서 희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러 번 상처받고 부딪히면서, 아이들도 결국 성숙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엄마인 나도 그렇게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