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오늘도 고생했어요.
얼마 전 지역의 봉사단체에서 만난 이들과 지역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나름 독서에 관심이 많아, 지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독서토론 모임을 이끌어가는 역할이었다. 국어국문을 전공했지만 독서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청소년기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이라든가 토론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청소년 필독서와 교육학 책도 찾아가며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뿐이었고, 어떻게 도움이 될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안타까운 건 함께 진행하던 연세 지긋한 부회장 분과 총무분과의 어긋난 의견차를 현명하게 좁히지 못한 부분이었다. 고민한 내용을 함께 준비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늘 바쁘다는 말과 문자를 읽은 후 사라져 버린 숫자 1 뿐이었다.
그저 학생들 어느 정도가 모여 함께 간식이나 먹고 책 읽는 사진을 찍어내면 예산을 받을 수 있다는데 계속해서 귀찮게 했으니 그들의 눈에는 내가 열의만 앞선 피곤한 사람으로 비쳤던 걸까. 그 과정에서 내가 '피드백이 답답하다'라는 단어를 썼으니 소위 나는 그들에게 찍혀버린 거다.
그 표현이 좀 과하긴 했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해 달라져버린 그들에게 실망한 건 사실이다. 큰 도시에서 작은 시골로 시집와 좋은 모임에 소속하기 위해, 난 어떻게든 무리에 끼고자 했다. 또한 모임의 학생들과 한 약속 또한 깨고 싶지 않아 끝까지 나의 역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마음만 앞서 떨어져 나오는 모양새가 됐다. 크고 작은 관계가 얽히고설킨 작은 무리에 몇 달 동안 몸 담으면서 느낀 것들이 있다.
성인(成人)은 성인(聖人)이 아니다
나는 30대의 작은 어른이고, 40대와 60대를 지나는 그분들을 큰 어른이라 생각했다. 살아온 세월만큼 생각하는 것도 어른답게, 동양 고전을 연구하시니 지혜로운 성인(聖人)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말 그대로 다 자란 성인(成人) 일뿐이었다. 그분들에 비해 한참 덜 자란 나를, 좋은 방향으로 함께 안고 갈 수는 없었을까? 우리는 모두 어른이지만 때론 어른이 아닌 채 상처를 주며 받으며, 지쳐도 웃어 보이며 애써 살아간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내 그릇도 어느 정도 커졌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상황에서 또 흔들리며 방황하는 걸 보니, 딱 내가 겪어온 만큼이 내 그릇이란 걸 느낀다. 방 한 칸에 살아도, 오랫동안 작은 곳에서 국한된 활동을 해도 온 우주를 수용하는 자세로 인생을 받아들인다면 그 세계만큼 성장할 것이고, 온 우주를 여행해도 자신이 본 것만 진실이라 여긴다면 한 칸 짜리만큼 성장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가방끈이 긴 사람,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사람,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신뢰하고 존경할 사람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점잖게 빼입고 진지하게 목소리 깔거나, 혹은 당당하고 큰 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에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그저 식사 자리에서의 침묵을 깨고자 회원들의 음울한 개인사와 지역 청소년들의 가정사를, 아무런 애정과 양심 없이 안주삼아 입에 오르내릴 때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싶었다.
그런데 지금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분들은 자신들의 개인사가 공개되는 것을 원할까? 아니 알고는 있을까?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그 모임에서 나오기를 주저한 건, 이대로 나오면 나도 그들처럼 '까일까 봐'서다. 증거도 없이 오직 추측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이 동네에서 얼마나 오래가는지, 뜬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 시집 오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관계를 끊고 싶어도 예쁘고 훈훈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고민하면서, 이 작은 세상이 새삼 무서워졌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세상이 날 싫어하지 않을까? 나의 행동이 용납될 수 있을까? 괜히 삐딱선을 탔다가 이도 저도 아니면 어떡하지? 세상이 날 손가락질하면 어떡하지?
언젠가 친구가 인간관계란 8대 2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10명 중 8명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2명은 날 싫어하며, 그 8명 중 1명은 날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10명 중 1명도 날 좋아할 가능성은 극히 드문 비율이라는 것이다.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돌이켜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산 지난 30년 동안의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피곤하게 살았는가. 그 친구와 자주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사랑받는 책이 있다.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
거기서 아들러는 말했다. 모든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는 그토록 처절하고 피곤했던 걸까. 이론을 놓고 보니 현상이 보였다. 사랑을 받겠다는 생각을 버리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사랑은 내가 하면 되니까. 여기저기 흩어졌던 사랑을 아껴뒀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펑펑 나눠줘야지.
이에 최근 읽은 책들의 인상 깊은 구절을 더한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중에서
“그나저나 네 여성 편력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는 세상이 용납 못 해.”
세상이라니 어떤 세상을 말하는 걸까요. 인간의 복수형을 말하는 걸까요. 대체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단 말인지. ‘세상이 아니라 네가 곱게 안 보는 거잖아?’
세상. 저도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개인과 개인과의 싸움이며, 게다가 그 자리에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다.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환영에 겁먹고 벌벌 떨던 데서 조금은 해방되어, 예전만큼 끝없이 눈치 보는 일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적당히 뻔뻔하게 처신하는 기술을 몸에 익힌 것입니다.
테스토스테론, <뭐든 시작하면 어떻게든 된다> 중에서
애초에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무리들에게 진지하게 설명할 의무나 필요는 없다.
'알아주면 좋고, 모르면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 정도의 태도가 딱 적당하다.
애초에 대화를 통해 이해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할 마음이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애정이 있는 비판은 귀담아듣고, 상처주기 위한 대부분의 애정이 없는 비판은 무시하라.
세상은 개인이다
관계 맺는 건 늘 어려웠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회피했고, 자리에 없을 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각오해야 했다. 맞서긴 두렵지만, 피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결국 상황을 마무리할 칼자루는 나에게 있다. 관계에서 잘못이 없다면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해보자. 세상이 욕할까 봐 미리 겁먹지 말자. 세상은 그저 개인일 뿐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상대는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하고, 일부를 전체로 해석해 나를 몰지각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그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묻겠지만, 사실 어디든 비상식적인 사람 한 두 명은 있잖은가.
오죽하면 어느 조직이든 반드시 한 명 이상의 돌+I가 존재한다는(그게 자신일 수도 있음) '돌+I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잘못된 거지 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제일 좋은 건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지만, 피할 수 없다면 그가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가면을 써보는 건 어떨까. 그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그가 어느 정도 호의를 베풀어오면 나의 반감도 어느 정도 누그러질 테니까.
누구나 인생에서 사람에게 치이는 그런 시기가 있다. 중요한 건 그 시기를 얼마나 잘 보내느냐이며, 그 시기를 현명하게 보낸다면 좋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시기도 오게 마련이다.
피곤했던 양의 가면을 벗으며
그래도 맺음은 확실하게, 훈훈하게 마무리하자. 더럽고 치사하고 다시는 보지 말자 다짐하지만, 오 년 또는 십 년 후 그 사람과 어떻게 마주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까.
지금은 속이 끓겠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 가식을 더한 양의 가면을 마련하자. 얼굴도 마주치기 싫은 그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는 그놈의 '관계'때문에 피할 수 없다면 가면을 쓰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해보자. 그리고 가면으로 지켜낸 내 에너지와 감정을 어디다 쓸지 고민하자. 인생에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엉뚱하게 쓰이던 내 감정의 종착역은 내 가족, 연인 또는 배우자, 친구가 된다.
오늘 하루도 가면을 쓰고 열심히 살아온 당신, 고생하셨어요.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