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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Jan 31. 2021

에밀 쿠스트리차, 언더그라운드 (1995)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게 거짓말을 하는군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작년 DMZ영화제를 통해 유튜브로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송환>(2003)을 보았다. 1992년 출소한 북한 비전향 장기수들을 10년 동안 무려 800시간에 걸쳐 찍은 영상이었다. 오랜 시간을 촬영해서 그런지 감독의 삶과 영화가 얽혀있었다. 비전향수들은 1959년 남파 도중 체포되어 군부 시절 살벌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사상을 전향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2000년 북한과의 극적 타결을 통해 북으로 송환된다. 감독은 첫 만남 때 교조적인 고위급 간부 출신 김석형 할아버지에게 본능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점차 다른 할아버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청년기의 열정과 신념이 감옥 안에서 수십년간 그대로 보존된 이들이 가진 어떤 순수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특히 감독과 조창손 할아버지의 관계는 유독 돈독한데, 할아버지의 조용하고 성실하며 남을 돕는 성품에 서서히 감화된 감독은 어느순간 그를 '선생'으로 부른다. 그러나 북으로 송환된 이후 금의환향하여 영웅이 된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어딘가 낯설고, 영화는 공허감을 감추지 못하는 감독의 쓸쓸한 뒷모습을 조명하며 마무리된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송환>이 다시 떠올랐다. <언더그라운드>는 20세기 안에 세계 지도에 등장했다가 다시 지도 상에서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에 대한 쿠스트리차 풍의 캐리커처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인물들도 위의 비전향 장기수들처럼, 반파시즘이라는 대명제를 그대로 가지고 외부 세계와 차단된 채로 20년의 세월을 보낸다. 1940년대의 사상과 신념을 현재도 유효하다고 믿고 있는 이들은, 혈기왕성한 청년기의 신념이 한번도 시험받지 않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인간적인 순수함을 드러낸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외부에서 카메라를 투시하여 들여다볼때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해 보이고, 그  풍경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한마디 농담에 불과할 것이다.


지도 상에서 사라진 나라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동구권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공산당이 기치로 걸던 반파시즘, 자유, 민주주의라는 대의가 사라지자, 서방 세계에서 공산당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공산당원은 확연히 줄어들고 선거에서는 소수파를 면하지 못했다. 반면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가 이끄는 유고 연방은, 곧바로 1945년 11월의 선거를 장악하고 외부의 지원 없이 자생적인 공산주의를 이룬다. 그 어떤 국가보다 급진적이고 성공적인 사회주의 모델을 구축한 유고 연방은 초반에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영화에도 잠시 언급되지만, 점차 이 나라는 그리스, 불가리아 등 남쪽으로 뻗어나가서 '영토 회복'을 이뤄내고 발칸반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야망을 가진다. 몇 년 안 가서 유고슬라비아는 그리스의 폭동을 지지하고, 이탈리아와 트리에스테-이스트리아 반도를 두고 분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이는 스탈린의 관심사에서 전혀 벗어나, 독재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해방 후 지도계층이 된 마르코(미키 마뇰로비치)의 연설에서 당시의 정세를 읽을 수 있다.

놈들은 우리의 조국에서 우리의 몸을 조각냈습니다. 우리는 총으로 국민투표와 자유를 얻고 지켜냈으며 트리에스테를 지켜낼 것입니다

스탈린은 볼셰비키와 소련 혁명만을 유일한 공산주의 혁명의 모델로 삼으려했다. 독재자는 혁명보다도 본인 스스로의 권력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에, 티토의 독자노선은 그의 심기를 매우 거스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48년에 유고 연방은 코뮌 포름 회의에서 추방당한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점화되고, 결국 두 나라는 결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고 연방은 냉전기의 세력 균형을 편의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서방(대부분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국방비의 상당수를 충당한다. 이후에 유고슬라비아의 경제는 동구권에서 유례없이 번창하였고, 티토는 그 덕분에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에게 유일무이하게 존경받는 지도자가 된다. 영화는 1980년 티토의 사망이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실제 대중들의 얼굴들을 찬찬히 보여준다. 이들의 얼굴은 우리 사회의 70년대 말 풍경을 닮아있다. 1989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슬로베니아를 기점으로 유고 연방의 여러 나라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10년간 이어진 참혹한 발칸의 내전이 시작된다.


분열된 영혼을 위한 심상지도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언더그라운드>는 2차 대전이 끝났다는 것을 모른 채 20년 간 지하에서 무기를 제조하며 살아가는 구 유고슬라비아, 현 세르비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지하도 안에는 지상세계를 복제한 또하나의 세계가 있다. 이들은 무기를 생산하고, 피트니스도 하고, 목욕탕도 가고, 결혼도 하고, 누구 아이인지 모를 아이도 출산하며 지상과 엇비슷한 삶을 영위한다. 가끔 한 번씩 누군가가 사이렌을 울리면 직접 만든 탱크 안으로 대피도 하면서 20년의 시간은 그들 안에서 평화롭게만 흘러간다. 이들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멜팅 팟인데, 아마 주로 세르비아 계일 테지만 다양한 계층, 민족, 종교가 공존한다.(카메라가 이동하는 도중에는 기도하는 무슬림도 보인다.) 이는 인종, 민족, 종교별로 갈라지지 않고 서로를 죽일 필요도 없었으며 하나로 뭉쳐 있던 공동체에 대한 강한 향수를 품고 있다. 20세기 중 가장 극악무도한 2차 대전기가 이렇게 애틋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다.


지상에서 이미 소멸해버렸지만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티토 치하의 공산주의의 기억이 바로 언더그라운드이며, 이는 '인민들'의 마음 속에 그려진 심상 지도다. 발칸의 기구한 역사를 몸소 겪어내는 이들의 분열된 영혼을 한데 그러모으기 위해, 기억은 과거에서 현재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지하에서 마르코의 속임수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 감각을 잃고 과거의 시간에 붙박힌 채 살아간다. 반면 지상에서는 정권의 명을 받아 마르코와 블래키(라자르 리스토브스키)의 2차 대전기 영웅담이 과장된 픽션으로 재생산되어 정권을 먹여 살리고 있다. 블래키와 그의 아들 요반은 영화 세트를 여전히 진행 중인 2차 대전의 현장이라고 오해하고, 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이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만다. 오직 이 둘을 오고 가며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이 간극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마르코와, 그와 결합한 나탈리아(미란다 조코빅)뿐이다. 마르코는 타고난 언변가이자 기회주의자인데, 빨치산 출신의 건달이자 티토의 측근, 후대에는  단지 기회주의자로 전락하여 '전쟁의 모리배'라고 불린다.


영혼을 파는 사람

나탈리아라는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나치 독일 점령기에는 독일인 프란츠와 연애하고, 블래키에게 몸이 묶여 끌려와 결혼식을 올렸다가, 결국은 마르코의 구애에 넘어가 결국 마르코와 기구한 일생을 보내게 된다. 후일에 이 인물은 제정신으로는 마르코의 얼굴도, 블래키의 얼굴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고통스럽게 외친다. 그래서 술을 퍼마시고 춤을 추며 카니발 음악에 몸을 맡긴다. 나치 독일, 노동계급 출신 공산주의자(전기공, 혹은 전봇대공 블래키), 인텔리 공산주의자('시인' 마르코) 모두가 호시탐탐 노리는 나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그 자체라고 생각해도 무리 없다. 결국 그녀를 최종적으로 차지하는 사람은 마르코인데, 2차 대전이 끝나가는 폭격 속에서 둘이 탱고를 추는 장면에서 두사람의 순수한 시절의 사랑은 절정에 이른다. 나탈리아는 마르코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이렇게 말하면서 그와 손을 잡는다.

마르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게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그가 감언이설로 꾸며낸 거짓말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서서히 그들의 삶을 말려죽인다는 것을 나탈리아는 부인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다. 공산주의자, 인텔리 계층이며 철저한 기회주의자인 마르코에게는 신이 두렵지도 않느냐는 말은 공허하게 허공을 때릴 뿐이지만, 이것은 최후의 순간에 커다란 메아리의 울림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다. 결국 그가 도둑, 범죄자, 살인자, 정서불안자... 어쩌면 그 총합인 괴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탈리아는 구토감과 경멸을 느낀다. 그러나 마르코가 벌어다 주는 부는 끝내 그녀를 연극에 동참하도록 한다.(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역사적 은유) 연기하는 나탈리아를 블래키는 감동에 차서, 요반은 경이롭게, 그리고 침팬지 소니는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미 첫 결혼식에서 블래키는 나탈리아를 보고 '영혼을 파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거짓말에 농락당하면서도 각성 없이 그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민들, 기회주의적이고 양심을 팔아넘긴 인텔리 계층, 중첩된 기억으로 정신분열이 되어가는 국가, 이들 사이에서는 후세대가 재생산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혈맥을 잇다

블래키의 아들 요반의 결혼식과 사람들의 카니발 파티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침팬지 소니의 장난으로 탱크가 벽을 폭파한다. 단절된 과거가 갑자기 물밀듯 쏟아져 나오며 과거와 현재의 혈맥이 다시 이어진다. 신념으로 똘똘 뭉친 블래키와 요반은 자신들이 현실이라고 믿는 영화세트장에 출격한다. 혈기로만 가득한 이들의 시대착오적 현실은, 이상화된 픽션(영화 세트와 배우들)과 무방비한 상태로 충돌하며, 그 결과 혈이 난무하는 카오스가 펼쳐진다. 아버지와 아들은 평생에 걸친 숙원사업을 마치고 이제 이상향을 향해 다가가듯 함께 노를 저어 간다. 그러다 처음 뜨는 해를 바라볼 때, 세상이 새로 태어나는 풍경은 그들의 내면처럼 고요하다. 지극히 아름다운 이 순간만큼은 떠들썩한 음악이나 익살극에서 잠시 벗어나, 인물들의 얼굴에 비추는 햇살을 보며 숨을 죽이게 된다. 그렇게 관객의 시선은 20년 만에 난생 처음 일출을 바라보는 인물의 경이로운 시선으로 합치된다. 이어서 한 평화로운 강변에 배를 정박해놓고 블래키가 다 큰 아들을 물로 끌어다 물장구치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통째로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원형적 심상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도 무지하고, 적의 진짜 정체도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인물들을 보며 보는 이의 허망함은 가중된다. 감독은 인물 각자의 이야기를 허투루 다루지 않고 영리하게 전체를 조망하면서, 각자의 파멸을 한편의 거대한 드라마로 보여준다. 우물로 뛰어든 신부와 거친 강물에 휩쓸려간 신랑은 수중에서 다시 결합하며, 둘이 함께 유영한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는 저승에서도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우리는 물살을 헤치고 해를 좇아가다 물에 휩쓸려 사장되고 마는 첫 번째 죽음의 유형을 알게 되었다. 이 죽음은 뒤에 이어지는 뜨거운 죽음에 비하면 비교적 온정적인 죽음이다.


가장 잔인한 전쟁은 형제를 죽이는 전쟁

이제 또다시 세월은 흘러, 그나마 '인간적인 온기가 있던' 2차 대전이 아니라 현대 내전의 현장으로 이동한다. 세르비아 민병대(체트니크)와 크로아티아 민병대(우스타샤)가 서로를 죽이고, UN군이 가운데서 중재하고 있다. 블래키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반파시스트파가 되어 이들을 모조리 몰살해버린다. 그 와중에 이반은 아직도 <독일 = 나치> 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디어 지난 20년간의 비밀을 알게 된 그는 형을 찾으러 길을 떠나는데, 그가 찾는 유고슬라비아는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소니와의 재회,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아지트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황폐한 내전의 살풍경이 펼쳐져 있다. 십자가가 뒤집히듯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다. 바보 성자는 살인자로, 친구는 무자비하고 악랄한 적으로 둔갑한다. 죽음의 종소리와 십자가 곁을 원형으로 맴도는 불길은, 무지하고 희망에 가득차있었던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한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마르코와 나탈리아는 제단에 바쳐진 동물처럼 처연하게 타오른다. 이는 두번째 죽음의 유형이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집시들의 장송곡만이 위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후반부가 연출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도 오점 없는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감독은 정치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내전 중에 세르비아 군대가 범한 잔인무도한 반인륜적 행위들이 '형제간의 살인' 정도로 다분히 모호하게 다뤄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에밀 쿠스트리챠 감독은 정치적 문제때문에 <언더그라운드>를 마지막으로 은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과연 그의 각본은 나탈리아의 각본이 그러했듯 한편의 아름다운 우화 속에 진실이 부재했던 것인가? 그는 함정에 스스로도 빠졌던 것일까? 아직 내게는 그 여부를 판단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이 시선의 회피 속에는 뿌리깊은 죄의식이 들어차 있는 것 같다. 감독은 눈을 들어 90년대 이후의 세르비아인이 벌인 가학 행위들을 심층 탐구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현실을 외면하고 시대착오적 인물들을 내세움으로써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과거, 지하에 매몰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스스로의 '시대착오적인' 바람을 담고 있는 듯 하다.


한 시대의 종말 앞에서 각자 지하도의 하수구로 헤엄친 인물들은 흘러흘러 어떤 미지의 땅으로 부상한다. 이 땅에서는 이승에서 못다한 잔치가 벌어진다. 이미 지겹도록 이 정신없는 음악을 들었으나, 앞선 참혹한 장면을 정화해주는 집시밴드의 음악은 차라리 반가울 정도이다. 저승에서도 인물들의 관계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서로 가볍게 투닥이며 웃는 가운데 그들이 서있는 땅은 서서히 하나의 섬으로 분리되어 저 강물에 떠밀려 내려간다. 이제 그들은 이제 외부 세상과는 영원히 격리된다. 떨어져 나간 섬은 현실에 대한 면역 체계가 없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유토피아다.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위에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역사가 그들의 삶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사사로운 드라마는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몇 년 전, 부모님의 제안으로 가격이 저렴한 동유럽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적 있다. 개인여행을 주로 했어서 이런 패키지 여행은 근 10년 만이었다. 9박 10일간 무려 7개 국을 도는 일정이었고, 장거리를 내내 버스로 이동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중간에 토막으로 껴있는 보스니아, 다시 자그레브를 거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까지 돌았다. 지금 생각해도 경악스러운 일정이다. 버스로 어마어마한 거리를 이동했고, 도시 하나를 보는 데 1시간 정도를 주는 때가 허다했다. 다뉴브강에서 투어하던 한인들의 사고가 난 이후라서 가이드는 엄청 예민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슬로베니아의 호수나 플리트비체의 에메랄드 빛깔만큼이나, 007에 나올 법한 킬러들이 등장할 것 같은 구소련식 건물, 그리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황량한 들판과 그 사이에 보이던 한 무리의 무덤들이 기억에 남는다. 저 무덤은 내전때문에 죽은 수많은 청년들의 무덤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그 무미건조한 들판에 잠들어있는 진짜 사람들의 표정들은 볼 수 없었다.

올해 <언더그라운드>를 보면서 조연과 주연을 가릴 것 없이 뛰어난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를 보며 그 무덤을 봤던 기억을 소환했다. "티토, 티토, 티토" 다같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지하 세계 사람들의 얼굴과, <송환>에서 야유회에 나가 한목소리로 김일성 찬양가를 부르던 장기수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전자를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었으나 후자를 볼 때 나의 긴장되고 불편한 감정은 훨씬 컸으니, 구 유고 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의 국민들이 이 영화를 볼 때의 그 각각이 느끼는 감정은 다 복잡미묘하게 다르겠거니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또 한편으로, 영화에는 긴장을 이완해주는 음악적인 드라마가 있다. 모든 갈등과 긴장이 녹아내리는 그 몇 안되는 장면들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탱고 음악과 함께 나온다. 마르코와 나탈리아가 공습 아래 탱고를 추는 장면, 아버지와 아들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장면, 이반이 침팬지 소니와 재회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 처연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떠들썩한 영화를 몇번이고 다시 돌려볼 수 있을 것 같다.

[Eurofilm 9. 유고슬라비아 ・ 프랑스 ・ 독일 ・ 불가리아 ・ 체코 ・ 헝가리]


참고 문헌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 I권> pp.258-261
http://www.altcine.com/details.php?id=1460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90

2020년 12월 25감상/ 2021년 1월 30일 재감상 / 2021년 1월 3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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