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랄 산맥을 걷듯 시간 속을 걷다
구정에 친척들이 모일 수 없어서 줌으로 새해 인사를 나눴다. 세팅을 어려워하는 고모를 도와드리다가 30분 정도가 흘러서, 웃프게도 결국 인사를 짧게 하고 대충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끝나기 전에 아버지가 거의 20년도 더 된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줌 화면으로 공유했다(이것 때문에 또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나의 윗세대 어른들은 놀랍도록 젊었고, 우리는 천진난만한 아기였으며, 특히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가장 길게 담겨 있었다. 영상에 내가 안 나와서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말씀하실 땐 내가 캠코더를 잡고 찍었던 것이었다. 영상이 나오자 아빠들은 꼬마 시절 나랑 사촌들이 귀엽다면서 깔깔 웃었다. 사촌 동생은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보다가 화면 바깥으로 잠깐 없어졌다가 울고 돌아왔다. 엄마와 작은엄마는 이때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라면서 내내 싱숭생숭해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년 전 영상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했고, 부모님이 당시 저분들의 나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영상을 공유하여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 시절의 자신을 거울삼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부모님의 60대 모습을 보면서 나의 부모님을 그 자리에 비추어도 보고, 40대였던 부모님의 시절을 내게 앞으로 다가올 나의 40대와 겹쳐도 본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먹고사는 생활은 조금 더 나아졌고, 가족 간에도 많은 복잡한 일들이 있었다가 천천히 하나둘씩 정리되었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증에서 차츰 자유로워졌다. 많은 추억과 상처를 남긴 그 시절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연기처럼 사라진 시간과 기억의 파편 앞에서 당황스러웠다. 저 시절은 과연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기계 장비를 사랑하며 기록벽이 있다고 의심되는 우리 아버지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이런 영상을 수백 개씩 아카이브 해두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용량이 너무 커서 남들에게 공유해 줄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아카이브는 결국 내가 이어받게 될까? 나는 언젠가 아버지의 아카이브를 이어받고,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억의 조각을 이어 붙이며 그 시절을 더듬어 갈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자전적 영화이며,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난해한 편이라는 <거울>을 이번에 감상하면서 나는 시적 은유나 철학적 개념보다는 차라리 가장 원초적인 내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기로 했다. 영상 시에 더 가까운 이 영화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적 개념 안으로 억지로 끼워 맞췄을 때 그 함의가 오히려 퇴색되는 것 같아서였다. 영화 대사 중 <시인이란 우상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듯, 러시아가 아닌 한국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에게마저 여러 가지 상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으로 시의 역할은 충분했다.
영화의 중심 화자는 성인이 된 알료샤이며, 현재 편도염을 앓으며 병상에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다. 그에게는 나탈리아라는 이혼한 전 부인, 그리고 이그냐트라는 아들이 있다. 모든 캐릭터는 두 세대의 1인 2역을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아버지-어머니-알료샤의 관계 구도는 알료샤-나탈리아-이그냐트의 관계 구도를 명백하게 서로 투영한다. 거울이 다각도로 서로를 비추면서 무수히 많은 상이 생겨나듯, 현실과 꿈, 기억은 서로 분절되지 않는 채 서로의 상을 주고받는다. 화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1936년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영화는 알료샤의 전쟁 이전의 몽환적이고 목가적인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남편 없이 자식 둘을 키우며 삶이 주는 뼈아픈 치욕과 모멸감을 견뎌내야 했던 그의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던 화목한 그 시절에 대해 나도 모르던 향수를 느끼는 나와, 그시절 당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다시 느꼈던 엄마의 감정이 서로 교차되었던 것이 생각났다.
다시 알료샤의 유년기로 가서, 빗속을 뚫고 급하게 인쇄소로 달려가는 그의 어머니가 있다. 국립 출판사 특별 출판물 교정지에 자신이 실수를 했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인데, 정치적으로 가장 혹독했던 스탈린 치하 시절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식과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경제적 궁핍과 덤으로 주변 동료들에게 손가락질까지 받던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주던 좋은 시절은 물인지 불인지 모를 세월의 흔적에 허물어 내린다. 그녀의 거울 맞은편에는 현시점의 나탈리아가 있다. 나탈리아에 따르면 알료샤와 그녀는 <인간적인 대화>를 한 적이 없다고 하며, 이그냐트는 점점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한다. 알료샤는 어머니를 닮은 사람과 결혼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녀들'과는 점점 소통을 할 수 없음을 느낀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를 어머니 본인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아들 간의 소통 부재는 <면도칼을 들고 쫓아오는 미치광이 같은 운명>처럼 전승되고 반복된다.
영화는 진정한 소통도 불가하지만 결국 떠날 수도 없는 어머니, 아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해주는 어머니인 <마더 러시아>의 간략한 일대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앞서 1936년의 시점으로 이동했던 영화는 다시 알료샤의 현시점으로 돌아오는데, 이번엔 아들 이그냐트의 입을 빌어 그보다 100년 전의 제정 러시아 시절로 시점을 이동한다. 이그냐트는 책을 집어 들고 1836년에 푸쉬킨이 차다예프에게 쓴 서간문을 읽는다. 그의 선대는 <교회의 분열로 유럽에서 고립되어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사건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던 역사적 암흑기였다. 당대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유럽에 비해 낙후되었고 역사적으로 뒤처져 있었지만 나름대로 자신만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그러나 유럽으로부터의 고립이 끝나고 20세기의 두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들면서 러시아는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가 되고, 스스로의 운명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어지는 장면은 <레닌그라드 폭격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살아간 20세기 중반을 여러 편의 다큐 푸티지로 환기한다. 전쟁 중 아이들을 피신시키며 기차 플랫폼에서 아이들에게 키스를 하는 부모들, 최초로 성층권에 진입하는 소련의 기구, 크리미아의 시바쉬 갯벌을 지나는 1944년의 소련 군대,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1965년 문화대혁명기에 다만스키 섬에서 중국 데모대를 저지하는 소련 국경 방위군까지. 감독은 뚜렷하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간파할 수 없게끔, 말더듬이처럼 역사적 기억을 가지고 횡설수설한다. 영화는 각 시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데, 다음에 타르코프스키의 생부가 낭송하는 시에서 그 의미가 더 분명 해지는 듯하다.
나는 예언을 믿지 않는다
나쁜 징조도 믿지 않는다
비방이나 독약도 겁내지 않는다
세상에 죽음은 없다
우린 모두 불멸의 존재이다
모든 것이 죽지 않는다
17살이든 70살이든 죽음을 두려워 마라
오직 빛과 현실이 있을 뿐 어둠은 없다
이 세상에 죽음도 어둠도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해변가에 닿아
그물을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불멸이 물고기 떼처럼 몰려올 때
집에서 살면서 집이 버티게 하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대를 불러 내서
그곳에서 나의 가정을 꾸미리라
그리하여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나와 같은
식탁에 앉게 되고
증조할아버지들과 손자들이 같은 식탁에 앉게 될 것이다
미래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손을 들면 오색 빛이 너와 함께 머물리라
지나간 나날들을 갱도의 버팀목처럼 내 어깨로 떠받쳤고
땅을 측량하듯 시간을 쟀고
우랄 산맥을 지나듯 시간 속을 걸었다
나는 내게 맞는 시대를 선택했고
우리는 먼지 나는 초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향했다
안개 피어오르는 키 큰 잡초 속에서
메뚜기는 뛰고, 더듬이로 편자를 만지고
수도승처럼 예언을 하며 나에게 파멸을 경고했다
나는 내 운명을 안장에 묶고
지금도 어린 소년처럼 미래가 등자에 서 있는 것을 본다
내 피가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흐르는 것만으로 불멸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하고 아늑한 구석을 위해서라면
항상 내 삶을 자진해서 바치리
나는 덧없는 인생의 바늘귀에 실처럼 꿰어서
온 세상에 옮겨질 수 있으리
*시의 연은 필자가 임의로 띄었음
시인이 말하길 나이가 들어 갈 수록 우리는 내게 잘 맞는 시대, 가장 좋아하는 시대를 환기하여 그곳에서 터를 잡고 식물들처럼 뿌리내린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착란을 일으키면서도 <갱도의 버팀목처럼> 시간의 무게를 버티며, 산맥을 걸어 통과하듯 시간 통과하여 가장 지우기 싫은, 언제나 생생하게 느끼고 싶은 그 시절로 회귀한다. 알로샤에게는 풀 먹인 식탁보가 있는 통나무집의 기억이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정신적 고향이 존재한다는 뜻일 것이다.
어느덧 결말부에 이르렀다. 가난에서 오는 모멸감을 느끼고 구역질을 느끼는 어머니와, 옆방에서 그녀를 무력하게 기다리던 알료샤의 기억이다. 어린 알료샤가 거울을 바라볼 때, 어린 시절의 그가 실제로 거울을 바라본 것인지, 아니면 회상하고 있는 현재의 알료샤의 시선을 투영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가난이 인간의 존엄을 한풀 꺾을 때, 방 안의 미약한 불빛은 그와 동시에 꺼진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이상 포기하지 않는 듯, 거울을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 속에 통째로 집어넣는다. 그를 추동하는 생명력의 원천은 마치 이 불에 대한 기억인 것처럼.
전쟁 중에 만난 입술이 갈라진 빨간 머리 소녀가 불타는 나뭇가지를 들고, 불이 그녀의 손 혈관을 비쳐 발갛게 달아오르는 순간, 빨간 머리 소녀는 그 자체로 불타오르는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생명력, 사랑, 그리고 욕망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마찬가지로 농장의 헛간이 불타던 장면은 알료샤의 기억 속에서 늘 반복 재생된다. 모세의 떨기나무를 상기하는 불붙은 나무는, 전쟁의 기억마저도 정화할 수 있는 계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오직 자신의 심정적 고향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따뜻한 온기, 나아가 가슴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다. 흑백 영상으로 담긴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의 열화마저도 알로샤의 기억에 뜨겁게 아로새겨진 불의 심상보다 덜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연유일 것이다.
나무들은 서두르며 돌아다니지 않아요
우린 항상 바삐 뛰어다니죠. 안달하고 하찮은 말이나 해대며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본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린 항상 뭔가 불신하고 항상 서두르죠.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서로를 비추며 무수히 반사되는 꿈과 기억들, 회화적으로 아름다우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이미지들, 시적이고 함축적인 대사들,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의 흐름들... 영화의 한 장면씩 몇 번을 곱씹어 보고 나서야 문득 어떤 '단어'들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려 할 때는 한 문장마다 왠지 망설이게 되었다. 더듬거리면서 지금과 같은 글을 쓰기까지, 영화 러닝타임의 몇 배 되는 시간 동안 괴로워하면서 멈추고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말을 할 필요 없는,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영화에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감독의 자전적 영화를 통해서, 그의 작품관에서 눈에 띄는 지배적 이미지(예를 들면 <희생>의 나무와 불타는 집)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조금은 잡게 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말처럼 <지나간 나날들을 갱도의 버팀목처럼 내 어깨로 떠받치고, 우랄산맥과 같은 시간 속을 걸어가, 선택할 수 있는 내게 맞는 시대>가 나에게도 있는지 스스로 물었다. 여러 시절들을 검토해 봤을 때, '아마도 이 시절이 가장 행복했나봐' 라고 생각했던 후보지들은 몇 개 있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어떤 시절에 정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더 밝은 내일의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자신에게 실망을 하고 좌절했으면서도 넌 아직도 스스로를 포기 못했구나, 하고 잠시 생각한다. 한편으론 이제 불과 2-30년 뒤면 정산을 마치고 기억 여행에서 정착할 때가 온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두려운 생각이 밀려든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없다면 어떡하지? 하지만 어떤 기억 속에 영영 정착하지 않고 내일의 더 큰 행복을 기대하면서 사는 노년의 삶도 고달프겠다는 생각이 들며... 이 두서없는 글을 어서 빨리 마쳐야겠다.
[*Eurofilm 10. 소련]
이미지 출처
https://theartsofslowcinema.com/2017/12/19/the-filmind-in-andrei-tarkovskys-zerkalo/
https://steemit.com/films/@marinauzelac/film-class-3-andrei-tarkovsky-zerkalo-1975-sculpting-in-timehttps://en.wikipedia.org/wiki/Mirror_(1975_film)https://en.wikipedia.org/wiki/Mirror_(1975_film)
https://www.abittersweetlifestudios.com/expressway/2020/2/6/film-technique-the-reflection-in-andrei-tarkovskys-mirror
2021년 2월 20일 감상 / 2021년 2월 21일 씀 / *Eurofilm에 포함해도 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넣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