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 샤오시엔 <카페 뤼미에르>와 오즈의 카메라
지난 2달 간 글쓰기를 쉬면서 여러 가지 딴짓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큰 건은 혼자 집을 구해 본가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 그 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이라는 건 웃을 일이다. 나의 첫 '독립 기념일'은 이렇게 쉽게 연상되어 일부러 잊으래도 잊기 힘들게 되었다. 집을 구하겠다고 하자 내 주변의 8할의 지인들은,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숨만 쉬어도 돈이 들 것이라며 현실적인 경고를 했다. 누군가는 자취를 하면 외로울 것이라고 했다. 몇 주 동안 주말마다 발품을 팔아 서울 한 복판의 조용한 동네에서 집을 구했다. 잔금을 치르고 계약 맺는 날에 아버지는 내가 계약을 혼자 마무리 할 때까지 밖의 짐을 실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당신께서 도와주지 않고 혼자서 주도하라는 뜻이었다. 계약을 맺는 나와 기다리는 아버지 차의 그 거리를, 차유리 너머로 비치는 아버지의 옆 얼굴을, 오늘 쓰게 된 <카페 뤼미에르>를 보면서 떠올랐다.
예전부터 글이 잘 써지는 작업실 겸 내 취향의 공간을 꾸리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들이친 현실적인 고려들 - 보증금과 월세값, 소음, 채광, 단열, 방위, 해충, 건물의 연식 - 앞에서 들뜬 어린애의 철없는 생각이었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레이더를 세우고 세방을 구하자, 가구를 놓아야 했고 집안 살림에 몸을 적응하느라 시간이 빨리 갔다. 들뜬 기분 탓인지 집에 있으면 의외로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 며칠동안은 별 할일 없이 보냈다. 007 영화를 60년대부터 하나씩 정주행을 한다든가, 디자인 보다는 가격때문에 더욱 놀라운 빈티지 가구나 조명을 찾아 본다거나, 산책겸 편의점에 가서 야식거리를 산다거나... 그 틈에 벌써 집에 놀러온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은 집이 아늑하고 편하다고 한 반면, 가끔 짐을 가지고 오는걸 도와주는 아버지는 딸의 공간이 어색한건지 배려를 해주는건지 한사코 빨리 떠나려고 했다. 그 거리감에 잠시 당혹스러웠으나, 이내 그 거리가 편안하고 고맙기도 했다.
근황이 길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면, <카페 뤼미에르>는 허우 샤오시엔이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만든 오즈 헌정 영화이다. 어느 더운 토요일 여름 오후에 이 영화를 다시 한번 보았다. 요즘 나의 처지에 이입하면서 보아서 그런지, 영화는 무심한듯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이른바 '요즘 세대'의 기저에 깔린 불안을 짚어낸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만의 집에 호젓하게 돌아가는 길은 날아갈 듯 발걸음이 가볍다. 그런데 그 평화 가운데 어딘가 석연찮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일시적인 상태의 만족을 뚫고 나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2년 계약 기간 동안 생활은 잘 할 수 있을까, 그때도 직장은 안정되어 있을까, 다른 변화들은 없을까? 일부러 집에서 영화를 밤 늦게까지 보면서 그 미진한 느낌을 지워버렸고, 다음날 일찍 해가 일찍부터 뜨면 불안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생활과 값비싼 낭만이 그 뒤를 따라왔다.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열차 한 대가 철로 위를 달린다. 카메라는 철길의 아래에서 올려다 바라보는 앵글로 저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무심히 관조한다. 곧바로 페이드 아웃 후, 우리는 주인공 요코(히토토 요)의 공간에 들어와있다. 오즈를 닮고자 한 카메라는 인물의 시선보다 낮은 위치에서 고정된 카메라 숏으로 요코를 잡는다. 그리고 빨래를 널며 친구 하지메(아사노 타타노부)와 통화하는 대화를 롱테이크로 담는다. 통화중에 잠시 집주인에게 대만여행에서 사온 파인애플 케이크를 줄 때도, 카메라는 이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빈 방 안에 빨래가 바람에 살며시 나부끼는 모습이 그대로 담긴다. 폴 슈레이더가 '오즈의 금욕'이라고 표현했던 카메라 기술의 절제된 사용법은 21세기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대만 감독의 카메라로 재현되었다. 영화는 평범한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인물 삶의 평범한 외형을 보여주고, 열차 내부와 같은 그들의 속사정과, 열차 시스템도처럼 서로 스치고 교차하는 관계들을 심층적으로 보여주면서 인물들의 심연에 있는 외로움과 슬픔을 드러낸다. 이때 카메라의 태도는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인물들을 마치 풍경을 보듯이 거리를 두고 찬찬히 바라본다.
플랫폼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늘어선 승객들과 진입하는 열차 역시도 오즈에 대한 오마주이다. 카메라는 요코의 시선과 동화되어 기관사 운전석의 회중 시계로 향한다. 그녀는 가방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기관사의 시계와 대조하여 본다. 이 아날로그시계는 오즈의 <동경이야기>에서 노리코가 받은 물건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지금도 일본 철도 기관사들은 입사 시에 회중시계를 하나씩 지급받는다고 하며, 세이코라는 시계 회사는 1929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철도 공사의 회중시계를 공급하고 있다. 1세기 전, 기계식 시계를 쓰던 시절에는 시간을 다시 조정할 때 시계를 넣고 빼기 좋다고 해서 회중시계를 쓰는 관습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쿼츠시계로 바뀐 후에도 이 전통은 세월 속에 살아남았다. (마치 100년이 지나도 크게 바뀌지 않은 시계 디자인처럼.) 이방인의 눈에는 일본다운 고집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자는 '세상 어딘가에 저런 아날로그적인 전통이 있었구나' 하면서 낭만적인 설렘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오즈는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의식들을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았고, 우리 몸에 이미 익숙한 감각을 영화적으로 일깨웠다. <카페 뤼미에르>에서는 전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요코의 평범한 일상을 뒤따른다. 그녀의 첫 방문지는 친구 하지메의 고서점이다. 작가인 그녀는 대만 가수인 지앙 원여의 흔적을 2000년대 도쿄에서 찾고 있는데, 서점 주인인 하지메가 문헌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요코는 지앙 원여의 흔적을 좇는 일을 엄연한 본인의 업으로 인식한다. 집주인이 대만 여행을 다녀온 일을 묻자, 그녀는 "일로 다녀왔다"라고 답하며, 문헌을 찾아준 하지메에게도 지갑을 꺼내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 그런데 그녀가 하지메에게 선물로 준 시계는 대가성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후에 그가 사실 철도 소리를 녹음하는 철도 덕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싼 것 같다며 돈을 준다는 하지메에게 요코가 사양을 하자, 그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비친다. 이들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은 한번에 포착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일상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놓치기 쉬운 결정적인 순간들이, 기계식 회중시계의 부품들처럼 영화의 서사를 천천히 움직이도록 한다.
요코와 하지메의 관계를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그는 요코의 아이 아버지도, 현재 애인도 아니다. 피상적으로 봤을 때 둘의 관계는 '비즈니스' 협업 관계인데, 후반부로 갈 수록 하지메는 요코가 제시하는 알 수 없는 암호를 해독해주는 안내자나 조력자에 가까워진다. 아기가 노인의 얼굴을 한 얼음 아기로 바뀌는 꿈 이야기는, 기존에 존재하는 고블린 이야기로 해석되고, 요코의 정체 모를 불안은 하지메와 전화 통화를 하며 일정 부분 해소되는 것 같다. 또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의 해답을 과거로 더듬어 찾는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동질적이다. 고서점을 운영하고, 지난 세기의 음악가의 궤적을 찾고, 회중 시계와 웨이터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따라주는 커피 한 잔을 선물하는 요코와 하지메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흡수하면서 앞으로 질주해 나가는 새로운 세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앞을 직시하며 질주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에 뒤를 돌아보며 걷는 사람들처럼, 천천히 더듬어 나아간다.
가족 성묘를 하러 '타카사키'에 있는 본가에 들린 요코는 들어오자마자 마루에서 선잠에 든다. 이들의 대화나 시선은 서로 마주 부딪치지 않고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기차처럼 흘러간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요코를 부르지만 딸은 잠에 들어 답할 수 없고, 아버지는 딸이나 아내를 바라보는 대신 TV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감싸고 있는 여름 저녁의 공기는 무겁지만은 않다. "집이 편하긴 한가봐."라는 아버지의 짧은 대사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존재가 같은 공간에서 있는 것에 만족한다. 그런데 이 평범한 가족의 일상에 난데 없이 경적을 울리며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기차처럼 뛰어 들어오는 소식이 있다. 요코가 한밤 중에 깨어 어머니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 후, 전에 없던 새로운 긴장이 생겨난다. 성묘를 다녀와서 세 사람이 외식을 하는 장면에서 인물들은 카메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음식에만 집중하는데, 이전의 침묵의 무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먹는 행위에 열중하는 것 같지만 아마도 부모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요코는 그 일을 생각하는 부모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이것도 보는 이의 상상에 주어진 몫이지만, 이 미묘한 변화를 한 줄 대사 없는 단 하나의 샷이 대체한다.
아버지의 침묵은 더 무거워지고, 길게 늘어진다. 우리는 그가 딸에게 하고자 하는, 중요한 얘기가 무엇인지 끝내 알 수 없다. 영화 내내 딸과 아버지는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 허우 샤오시엔의 카메라는 그 허공에 떨어진 침묵을 응시한다. 부모가 요코의 집에 잠시 들린 씬에서 카메라 숏은 질문하는 어머니와 요코의 샷 - 리버스샷을 잡는 것이 아닌, 침묵하는 아버지의 옆 프로필에 포커스를 둔 채 대사를 진행시킨다. 어머니는 등만 보이고 요코는 그 너머에 흐릿하게 보이는데, 대신 우리는 요코의 아버지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사선으로 내려보는 시선, 연거푸 사케를 들이키는 모습, 작은 탄식과도 같은 한숨은 어쩐지 크게 들려온다. 요코는 아버지를 계속 외면한 채 어머니만 보면서 담담하고 꿋꿋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자식세대와 부모세대의 소통의 불능, 가부장이 이끄는 전통 가정의 해체 등, 오즈 영화를 관통하던 주제들은 2000년대에 들어 한층 복잡다변하고 불투명한 세태에 대비되지 않은 젊은 세대와 연금 걱정을 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로 옮겨온다. 자식 세대의 무심하고 당당한 태도에 어떻게 반응할 줄 모르는 기성세대는 한층 깊은 침묵으로 빠져든다.
하지메와 요코는 고지도를 가지고 지앙 원여의 흔적들을 찾아다닌다. 그녀가 지앙원여에게 천착하는 것은 대만-일본 혼혈인 아이가 살아갈 도쿄라는 도시 안에서 어떤 선례를 찾고자 함인듯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도쿄 사람들은 지앙 원여라는 이방인을 기억하지 못하고, 옛지도를 따라간 자리는 그가 즐겨간 '다트'라는 재즈 카페가 흔적없이 사라진 후이다. 카메라는 이 연기처럼 사라진 흔적을 좇아다니는 두 사람을 찍는다. 다트 카페가 아니라, 다트 카페를 찾기 위해 잠시 들른 카페만을 보여주고, 카페가 없어진 자리를 찍는 요코를 찍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다가가려는 그녀와 달리 하지메는 현재를 아카이빙하는 중이다. 지하철 소리를 매일 녹음하면서 달라지는 소리를 듣고, 모든 역을 기록한다.
하지메는 시각적으로 철도 시스템을 아카이빙한다. 그가 그린 전철의 태내라고 불리는 한 중간에 슬퍼보이는 얼굴로 웅크린 요코가 있다. 하지메가 철도 지도 사이에 그린 요코는 자궁 속 태아의 모습처럼 웅크린 모습인데, 그녀 스스로 말했듯이 "눈이 외로워보이고, 마치 울 것 같은" 요코를 수많은 철도가 자궁의 조직처럼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하지메가 요코를 표현한 초상이자, 그녀를 위해 그린 이 지도는, 지앙 원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지도보다도 요코의 현주소를 정확히 짚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메는 전철을 녹음하면서 깊은 곳에서 울리는 전철의 태동을 느끼듯,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은 그녀의 내밀한 감정을 들을 수 있다.
영화 내내 요코는 잠에 들어있거나, 잠에서 깨어 자신의 꿈의 이야기를 하는 등, 그녀에게는 잠과 관련된 씬이 많다. 주로는 악몽을 꿨다거나 몸이 안 좋아서 선잠에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씬에 가면 전철 안에서 나른한 햇빛을 받으며 잘 자는 장면이 나오고, 하지메는 그런 요코를 미소지으며 바라본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어딘가 무감각해보이는 요코는 두려움과 불안을 꿈의 언어로밖에 표현하지 못 한다.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렸으나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감정들이다. 이것을 해석하고 해결해 주지 못하는 부모를 대신하여, 그녀는 하지메와의 연대를 통해 불안에 잠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도시의 혈관과도 같은 철길 네트워크 위에서 가장 단 잠을 청한다. 마지막 씬에서 4개의 열차는 서로 스치고 교차하는 네 인물처럼 유유하게 각자의 철길을 따라서 달린다.
출퇴근이나 약속이라는 목적 대상이 아니라 생활 공간이 되어버린 서울은 여전히 낯설다. 서울에 살았던 적도 있으니 하루 아침에 익숙해지겠거니 했으나, 이방인이라는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가에 가면 진짜 내 집에 온 것 같으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진짜 나의 집은 이제 없어져버린 것이다. 집에 가면 부모님은 무슨 할 말이 있는 눈치이지만, 결국 내 눈치를 살피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마치 집에 와서 편안하다는 듯이 계속 잠을 자고, 또 잤다. 홀로 생활을 하던 긴장이 풀린듯이 몸이 지끈거리며 아팠고, 서로가 지켜야 할 건강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식탁 위에서는 하나도 안 하던 이야기를 아버지는 나를 역에 데려다 줄 때쯤 간신히 묻는다. 회사는 잘 되어가냐. 밥은 잘 먹냐. 나는 모든 걱정거리에도 불구하고 뭉뚱그려 모든 것이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딘가 고독하고도 자유롭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시간이 좀더 늘었다.
나에게 오롯이 주어진 시간은 더 많아졌지만, 홀로 일처리를 해야 할 시간도 많아져서 일상은 더욱더 바쁘게 흘러갔다. 눈을 뜨면 직장에 가서 일을 하고, 집에 와서는 원고를 마감하고 영화를 보고. 더위를 식히며 잠을 청했다. 이 생활을 유지해야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떨렸고, 그럼에도 나자신에게 믿음을 가졌다. 오직 직장에서 집으로, 집으로 직장으로 가는 시원한 버스를 탈 때가 어쩌면 가장 아무런 걱정 없는 순간이었다. 비싸게 얻어낸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이제는 내 집 마련을 해야겠다는 걱정도 잊은 채로 그저 도시의 혈관인 대중교통에 몸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겉보기에 아주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담고 있는 <카페 뤼미에르>라는 영화를 무심코 보았을 때, 어, 하면서 유심히 보게 된 장면이 있었다. 나도 몇달 전 누군가의 생일 선물로 회중시계를 사주었기 때문이다. 별로 갖고 싶다는 것이 없는 생일의 당사자는 고심 끝에 회중시계를 원한다고 슬쩍 말했다. 나는 일본 기관사들이 세이코 시계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다. 당시에는 빅토리아 시대 마냥 바지에 시계줄을 걸고 다니지 않는 이상 요즘 저걸 어디에 쓰나, 하고 반신반의했지만 실물을 보니 시계의 매끄러운 곡선과 우아한 숫자들, 얄쌍하고 조용히 돌아가는 시계바늘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며칠 후, 시계 주인이 운전석 옆 잘 보이는 곳에 달아놓은 그 동그란 물체는 어둠속에서 유독 반짝거리면서 빛났고, 창밖의 속력과 무관하게 조용히 자신의 리듬을 지키며 움직였다. 엔진 소리와 음악 소리만이 들리면서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물 속에서 유영하는 듯이 느리게 가는 시간을 체험했다. 그럴 때 앞으로 앞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던 내가, 잠시 뒤를 돌아보면서 뒷걸음질을 치게 되는 것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 <감독 오즈 야스지로>, 윤용순 옮김, 한나래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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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mdb.com/title/tt0412596/mediaviewer/rm373414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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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40469#photoId=24201
2021년 7월 8일 감상/ 2021년 7월 28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