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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ug 08. 2021

5G 시대의 20세기 스피-드

'진짜 쓸데없는' 한글 타자기를 쓰는 20대의 변

얼마 전 처음 만난 어떤 이와 취향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는 종종 다른 이가 보기에 “왜 저런 걸?”하는 물건을 소비하는데. 이러한 나의 취향을 소개하기 위해 ‘아날로그 타자기’ 이야기를 꺼내자 상대방의 반응이 꽤 재미있었다.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우와! 그거 진짜 쓸데없네요!”라고 한 것.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 무해한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지구 상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기술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서일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내가 5G 시대를 선도하는 MZ세대이기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겠지.


타자기를 들인 이유는 순전히 <루비 스팍스>라는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한때 천재 작가로 촉망받았지만 현재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캘빈은 어느 날 ‘꿈의 이상형’ 루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타닥 타닥 타닥 캘빈이 타자기를 두드려 만든 소설 속 캐릭터 루비는 그의 현실에 나타나고, 타닥 타닥 타닥 캘빈의 타자기가 찍어내는 문장대로 루비는 그를 사랑하고, 웃고 춤추고, 또 울고, 소리 지르고, 그를 떠난다. 결말은 별로였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의 장면들을 잇는 타자기 소리가 타닥타닥타닥... 하고 내 마음에 남게 된 거다.


영화 <루비 스팍스> (Ruby Sparks, 2012)


타자기를 구하는 과정은 아주 고되었다. 한글 타자기 대표 제조 업체인 동아정공(마라톤)과 경방기계(크로바)는 1996년에 타자기 생산을 중단했다. 내가 2살 때 생산이 중단된 20세기의 신문물 중 아직까지 제 기능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무려 3주 간의 폭풍 검색 끝에 부모님 댁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던 마라톤 네 벌식 한글 타자기를 중고마켓에 올린 내 또래의 여자분과 연락이 닿았다. 지하철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체감 5킬로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육중한 타자기를 건네받았다. 낑낑대며 타자기를 집에 데려온 날의 기쁨이, 그날 얻은 근육통만큼이나 생생하다.


타자기를 데려오고 몇 달이 지난 지금, 타자기를 꺼내어 타이핑을 한 것은 겨우 10번 남짓이다. 초등학교 1학년, 받아쓰기를 밧아쓰기라고 쓰던 시절에도 한글과 컴퓨터 타자연습으로 ‘메밀꽃 필 무렵’을 쳤던 나에게, 타자기는 정말 느린 기계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스피-드", 한글 타자기


타자기는 정말 느리다. 방금 이 문장을 노트북으로 만들어 내는데 2.5초가 걸렸다. 타자기로 ‘타자기는 정말 느리다’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검지에 힘을 주고 26개의 키를 꾹꾹 눌러야 한다. ‘정말’은 받침이 있어서 타자기로 만들어내기 꽤 어려운 단어인데, 받침을 실수 없이 찍어내기 위해서는 윗글쇠 고정장치와 사이 띄우개, 백스페이스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온 정신을 빠짝 집중해서 쳤을 때 14.5초가 걸린다. 그렇다. 네 벌식 타자기는 최소 6배의 시간이 더 걸리고, 6배나 생산성이 떨어진다. “우와! 그거 진짜 쓸데없네요!”라는 말을 들을만하다.


그럼에도 나의 네 벌식 한글 타자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타자기가 느리기 때문이다. 느리게 탄생하는 것들은 대게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우리 할머니가 직접 기르시고 땡볕 아래 수확한 참깨를, 마을버스로 1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읍내 방앗간에서 짜내서 탄생한 참기름 한 병처럼 말이다. 느리게 만들어지는 것들은 완성된 무엇인가를 받을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정성’의 고농축 집합체다.


타자기는 글쇠가 잉크리본을 눌러 그 모양대로 종이에 자국을 남겨 단어를 만들어 낸다. 선명한 단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검지에 힘을 주어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야 한다. 게다가 종이에 자국이 남은 글자는 지워낼 수 없다. Backspace나 Delete를 눌러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앨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 위에 태어나 의미를 가질 자음과 모음을 아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게 되면 아래에 있어야 할 받침이 위로 올라와 이상한 모양새가 되거나 아예 다른 단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한 문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문장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인 ‘꽃’은 쌍자음+모음+홑 받침으로 구성된 아주 복잡한 단어이다. ‘꽃’이라는 단어를 종이 위에 예쁘게 피워내기 위해 그간 내가 버린 종이와 잉크가 얼마나 많은지. 타자기를 치고 있노라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어느새 붉어진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다.


나의 마라톤 네 벌식 한글 타자기와 연습을 가장 많이 도와준 <여름의 빌라>


네 벌식 한글 타자기가 제법 익숙해지고 나서 잉크 리본을 새 걸로 갈았다. 선명한 마음으로 글쇠를 꾹 꾹 눌러 선명하게 단어를 찍어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책의 글귀를 타이핑하여 선물인양 사진 찍어 보냈다. 나의 이런 취향을 아름답다 해주는 친구에게도 ‘친애하는’으로 시작되는 짧은 편지를 쳐서 사진 찍어 보내주었다. 애인에게는 처음으로 A3 용지 한 장을 타자기로 채워 생일 축하 편지를 써주었다. 선풍기 앞에 앉아 2시간을 집중했는데도 엉뚱한 자리에 태어난 글자가 꽤 있었다. 그는 아마 모를 거다. ‘ㅅㅐㅇㅇㅣㄹㅊㅜㄱㅎㅏㅎㅐ’ 이 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자음, 모음, 홑 받침, 쌍받침, 쌍자음, 그리고 마지막에 유독 선명하게 남는 온점. 타자기로 꾹꾹 찍어낸 글자는 이 글을 받을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만큼이나 선명하다. 온 정성을 다해 찍어내야 하는 만큼 무겁고 깊다. 와이파이가 버벅거리는 찰나를 참지 못하고 LTE를 사용하는 내가, 5G 시대를 선도하는 세대인 내가, 20세기의 스피-드를 가진 나의 네 벌식 한글 타자기를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타자기는 느리고, 느리게 탄생하는 것들은 대게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의 네 벌식 한글 타자기, 사각 사각 돌려가며 모난 데 없이 칼로 연필을 깎는 것. 태엽을 감아 시계 밥을 주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괘종시계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해야지. 더 빠르지 못해 늘 불안한 오늘이 버거운 날이면 무거운 타자기를 꺼내어야겠다. 타닥... 타닥... 타닥... 누군가를 위한 마음을 꾹 꾹 눌러 담아 더 느리게 글자를 만들어내고, 타닥... 타닥... 타닥... 더 정성스럽게 선명한 마음을 찍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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