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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May 21. 2021

숨으면서 들키고 싶은 마음

 좋아하는 작가가 온라인 북토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작가의 책을 다 찾아 읽을 만큼 제법 몰두해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에 냉큼 안내문을 뒤적였다. 


 앗, 그런데 모집인원이 딱 열명뿐이다. 


 작가와 주최 측 인사까지 합류한다 해도 열두세 명으로 이뤄지는 작은 북토크. 이 정도 인원이면 일방적인 강연이 아니라 꽤 진중한 대화가 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걸 질문하거나 진심을 담은 감상을 묵직하게 던져볼 수도 있을 테다. 

 

 그래서, 그렇기에 신청 버튼을 선뜻 누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온라인이래도 좁은 방안에 바짝 얼굴을 마주 보고 앉는 느낌. 한점 가릴 곳 없는 모니터 앞에서 숨기란 무례를 감수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테고 그 상황을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줄기가 저릿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니 역시나 이 자리는 내가 갈 곳이 못되나 보다....... 

 내 손가락이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 불행히도 열 자리엔 빠르게 주인이 들어찼다. 고민이 끝났으니 다행인 건가. 


 이 삶을 서른아홉 해나 살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내가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어렵다. 



 구멍가게 문간방에 들어앉은 주인 할머니를 불러내질 못해 값을 치르지 못하고 다른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 멋쩍게 시간을 보내거나, 잘못 내어준 물건을 군소리도 못하고 들고 온 일은 부지기수. 

 하굣길에 떡꼬치 하나 사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 대차게 스쿨버스도 안 타고 집까지 걷겠다 마음먹어 놓고는 정작  '아줌마 떡꼬치 하나 주세요' 소리를 못해서 빈 위장으로 돌아온 게 또 몇 번.  

 집에서 혼자 연습할 땐 마치 눈 앞에서 뜨거운 해가 이글거리고 등 뒤에서 몸을 날릴 듯 돌풍이 불어대는 것처럼 헐리우드급 연기를 해대다가 막상 무대 위에서 심사위원이랑 눈이 마주치자 영혼 없이 대본만 줄줄 읊고 내려온 동화구연대회 등등등. 


 너무 사소해서 잊히고도 남을법한 일들 이건만 나는 지금도 그 순간들 앞에 서서 진땀을 흘린다. 빨리 커서, 어른이란 게 되면 괜찮아질 거라 기대했는데 젠장. 몸만 길어졌지 마음은 더 늘어져 후들거린다. 


 얼마 전 있었던 스승의 날이 또 고비였다. 마음속으로 몇 분을 떠올려보고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은 멘트까지 연습하고는 겨우 전화 한 통 걸고는 포기했다. 남은 분들껜 진심을 다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해마다 되려 스승님께 안부 전화를 받는 제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아이들 학교에 코로나 확진자가 여럿 생겨서 2주간 격리생활을 했다. 그런데 너무 편하고 좋은 거다. 타당한 이유로 어떠한 종류의 만남도 없이 내 공간에서 내 식구들과만 보내는 시간. 

 그래서 또 씨족 단위로 수렵,채집,어로 생활을 하던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존 밀림이나 마다가스카르 섬 같은 오지의 유일한 인류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등등 어린 시절부터 돌림노래처럼 되풀이했던 공상을 다시 시작했다. 

 새로운 만남 - 나를 냉큼 내보여야 하는 자리 - 따위 없는 삶. 

나에게 품은 마음이 호의인지 적의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사람보다 적의가 분명한 아나콘다를 마주치는 삶.

내가 속한 세계 이외의 세계에 대해 알리 없는 해맑은 무지함 따위에 관한 부질없는 망상들. 


 똘똘하게, 당당하게, 자신 있게. 안다. 그런 거 참 멋지다는 걸. 이 땅에 태어나서 더 큰 꿈, 더 큰 세계를 꿈꿔보는 것. 안다. 그런 이에게 대단한 성장이 주어진다는 걸.


 그래서 울며 겨자를 퍼먹어가면서 들킬만한 자리에 숨는다. 

 언제고 목덜미를 잡혀 못 이기는 척 끌려 나올 수 있게. 먼저 찾아가진 못해도 마지못한 척 주어지는 두려움, 그거라도 직면하며 한 발씩 내딛는 것. 그 작디작은 성장이 또 삶의 보람이긴 하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삐딱해진다. 생전 없던 물음이 자꾸 솟아난다. 


 좀 흐릿하고 애매하게 살면 안 되나? 

 적당히 등지고 때때로 숨고, 그렇게 살면 안 되나? 

 왜 그런 삶은, 그런 사람들은 멋지게 보아주지 않는 걸까? 


 속 없이, 투명하게, 어리숙하고 모자라게, 느리게, 둔하게, 변덕스럽게, 얄밉게, 신경질적으로, 무능하게, 느슨하게, 편하게, 투박하게, 되는대로 살고 싶다. 그러다 너무 아프면 숨고, 또 별수 없다는 듯 끌려 나와 어쩔 수 없이 살고 싶다. 

 꽁꽁 숨으면서도 누군가는 나를 꼭 찾아줬으면 하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으로 비겁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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