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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Jul 19. 2021

예술가의 초상

미술학원의 추억



부연 창을 투과하며 흩어지는 햇빛 사이로 부유하는 먼지와 눅눅한 습기가 엉겨 훅하니 끼쳐온다.


"계세요?"


엄마가 목소리를 높이니 깊숙한 곳에서 슥-직 슬리퍼 끄는 소리가 다가온다.

사람이 온 건지, 담배가 온 건지 텁텁하고 견고하게도 둘러친 담배냄새 때문에 잠시 코를 쥘까 망설였지만 바지 옆 섭을 그러쥐는 것으로 간신히 예의를 차린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삐쩍 마른 원장님의 옆얼굴을 훔쳐본다. 원장님 어깨너머에 걸린 빨간 금붕어와 어항 그림이 마음에 든다. 그 옆에는  바래다 못해 바스러질 것 같은 신문 기사 스크랩이 붙어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 국전 입상 아무개 씨'

한껏 고무되었어야 할 사진 속 젊은이는 조금 더 번듯한 옷을 입었을 뿐 표정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앙리 마티스, 금붕어






학교 앞 육교에서 무심결에 받아 든 전단지에서 '예술 중학교'라는 단어를 발견한 순간 내 속 어딘가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집까지 그 전단지를 품고 오는 동안 간지러움은 두근거림으로 바뀌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엄마에게 고함을 치기에 이르렀다.


"엄마 나 예술 중학교 가고 싶어!"


그림으로 큰 주목을 받아본 적도, 미술학원을 다녀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전단지를 받아 든 그 순간, 미술을 공부하면 내가 퍽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교육열, 치맛바람과는 거리가 멀고도 멀었던 우리 엄마에겐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지만 딸내미 성화에 전단지에 찍힌 번호로 부지런히 전화 다이얼을 돌릴 수밖에.

수화기 저편 입시 컨설턴트라는 사람은 예술 중학교에 가기 위해선 실기와 필기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정보를 주었고, 입시란 걸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던 우리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동네 유일의 미술학원 원장님 앞에 앉게 된 거였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낡은 건물의 3층 (어쩌면 4층. 엘리베이터가 없어 그저 마냥 오르면 마주치게 되는 곳). 오래된 문신마냥 창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석고상 스티커가 붙어 있는 폼이 묘하게 눈길을 붙잡던 곳이었다. 실은 그 건너편에 조금 더 번듯한 미술학원이 하나 더 있었지만 '입시'라는 단어로 치장한 모양이 '너무 본격적'인 것 같아 이곳을 택했다.


미술학원이 처음인 나의 처지와 참으로 공평하게도 원장님에게 찾아온 국민학생은 내가 처음이었다. 예술 중학교 입학시험엔 뭐가 나오냐며 되려 우리에게 물을 정도였으니 물정 모르기론 피장파장이었다.


여하튼, 나는 처음으로 미술 학원에 등록했다. 동네 모닝글로리에서 커다란 스케치북과 연필, 지우개, 물감과 붓을 눈에 띄는 대로 집어 들었다.


시험에 정물 소묘와 수채화가 출제된다 정도의 정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날은 사과를, 어느 날은 항아리를 그렸다. 삐쩍 마른 사과 몇 알을 내 멋대로 화면에 둥글둥글 그려놓으면 언제나 원장님은 참으로 분명한 톤으로 나를 칭찬했다. 지금 생각하면 입시가 불과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칭찬할 수 있는 상태의 그림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장님에게 또 나에게 어제의 나보다 오늘 조금 더 자란 나는 기특했고 또 기특했다.


담배냄새가 잔뜩 났지만 원장님이 내 곁에 앉아 그림을 봐주시는 시간이 참 좋았다. 원장님은 큰 붓에 물을 잔뜩 머금어 널찍하고 투명한 터치로 느긋하게 그림을 그려나갔는데 원장님 방에 걸려 있는 쨍하고 찐한 금붕어 그림과는 한참 다른 스타일이었다.


나는 이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물을 써서 채색을 한다는 수채화 본연의 느낌이 여실히 드러나는 맑고 가벼운 그림이었다.


몇 시에 가던지 학원은 늘 한산했다.

어느 날부턴가가 원장님은 큰 테이블 몇 개를 이어 붙여 놓고 큰 간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편에서 항아리를 그리고, 원장님은 저 편에서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시트지를 잘라 붙였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대부분 원장님은 하릴없이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셨는데 같이 작업을 하고 있으니 진짜 작업실 같고 괜스레 신이 났다. 학원 간판을 다시 만들어 다는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숫기는 없었기에 형태가 갖춰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사우나'던가 '찜질방'이던가 그런 의미의 글자가 등장했을 때 원장님 사모님이 가게를 여시는데 쓸 간판이라는 짤막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 미술학원에서 나 같은 애나 가르쳐서는 풍족하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전문 간판장이가 아닌 미술학원 원장이 그럴듯한 간판을 완성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울대 미대 출신 - 국선 입상자의 미적 센스와 손재주가 담긴 간판은 평범하고 재미없기 그지없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미술학원을 옮겼다.  


뒤늦게야 입시엔 유행이 있고,  트렌드를 빠르고 정확하게 읽는 전문 학원이 있으며,  학원 출신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칭 예중 입시 전문가가 나의 그림을   보더니 1970년대 유행하던 처져도 한참 뒤처진 화풍인 데다 연습량도 느긋하고 방만하기 그지없어 이런 식으로는 합격은 꿈도   일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단다.


새로 다니게 된 미술학원은 상계동, 집에서 전철로 한 시간 거리였다. (얼마 전에야 엄마가 연고도 없는 먼 동네로 보낸 연유를 알게 되었는데 다닐만한 거리에 있는 이렇다 할 학원들은 합격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니 학원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성화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늦은 거 4월 말에 예정된 경주로의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가기로 한 번 더 물정을 거스르는 여유를 부렸다.


새 학원은 준비물을 챙기는 것부터 유난이었다. 스케치북도 소묘용과 수채화용 따로, 연필도 세 종류로 각기 다른 진하기, 팔레트엔 칸마다 정해진 색, 정해진 브랜드 (어떤 건 홍대 앞 화방에서, 어떤 건 인사동 화방에서 구입해야 했다)의 물감을 미리 짜서 말려가야 했다.  

처음 학원에 간 날 부원장님이 (이곳엔 원장님 - 부원장님 - 보조 선생님까지 있었다) 벽돌 그리기 시범을 보였다. 나를 포함 열명 남짓의 입시생이 꼼짝 않고 둥글게 이젤을 둘러싼 채 지켜보았다. 그리고 바로 실습. 모두가 같은 색을 섞어, 비슷한 크기의 터치로 같은 순서로 벽돌을 채색해나갔다. 그리고 반복, 반복, 반복....


이런 식의 트레이닝에 익숙지 않았던 나에게 8시간 동안 똑같은 벽돌을 그리는 상황은 무척이나 고되었다. 그러나 진짜 고난은 그 벽돌을 일제히 벽에 붙이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적나라하게 등수가 매겨지던 순간,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당연하다는 듯 손바닥을 내미는 아이들, 내리치는 선생님의 무표정함을 지켜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새 학원의 원장님은 나를 예뻐했다. 멀리서 혼자 전철을 타고 오는 것도, 늦게 시작해 제법 빠른 향상을 보이는 것도 기특해했다. 나 같은 딸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고, 나만 때리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학원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적나라한 등수 경쟁 속에서 나는 애정 경쟁까지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부터는 12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2학기 학교 수업은 오전만 참석하고 조퇴 후 학원으로 향했다. 등수가 매겨지고 매서운 비판을 받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깜깜한 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한 시간 동안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마저도 원장님에게 지하철에서 셜록홈스 전집을 다 읽었다 자랑했다가 그 시간에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지 무슨 시간낭비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한 귀로 흘리고 애거서 크리스티를 한 권씩 챙길 만큼은 무뎌져있었다.






합격통보를 받고 그날로 미술학원을 그만두었다.


우리 학원에서 합격한 건 가장 오래 입시를 준비했던 아이와 가장 늦게 시작한 나 둘 뿐이었다.

그 이후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미술학원은 다신 다니지 않았다.


몇 번쯤 미술학원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나의 첫 미술학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아마 망설임 없이 향했을게다. 숙대입구 사거리 논꼴 미술학원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졌다.

사모님의 찜질방이 장사가 잘 되어 그쪽에 일손을 보태고 있으려나, 별수 없이 카운터에 앉아 있을 원장님을 상상해본다.

뒷 벽엔 여전히 마티스의 금붕어가 (원장님의 그림이 아니었다) 붙어 있을까? 원장님은 마티스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그 허수룩한 등을 웅크려 투명하기 그지없던 붓 끝에 그토록 진한 색을 듬뿍 찍을 수나 있을까?


허술하고 애매한, 퀴퀴한 냄새 가득한 그곳에서 나는 진짜 그림을 그렸었다.


흔히들 입시 미술엔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들어 있던 담배꽁초를 탈탈 털어 정물대에 올려진 옹기와, 삐쩍 마른 사과 몇 알을 그리면서도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손을 움직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물감을 고르고 연필을 집어 들었다. 누구 보다, 누구 만큼을 생각하느라 초조해질 필요 없이 느긋할 수 있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진짜 칭찬과 격려를 눈치 볼 것 없이 흠씬 받았다.


물론 그곳에 계속 남았다면 예술 중학교엔 들어가지 못했을 거다. 그건 새 학원 부원장님의 노련하고 선명한 벽돌이 스케치북 위에 완벽하게 떠오른 순간,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조금 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벽에 그럴듯하게 걸어놓을 작품 하나 남기지 못했더라도, 어떤 등쌀에 시트지를 오리고 네온사인을 조립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미움받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칭찬만을 돌려줄 수 있는 그런 삶이라면 그 편이 더 멋졌을 것도 같다.


그래서 나에게 막연히 예술가의 모습을 그려보라 한다면 기억 깊은 곳에서 담배냄새부터 끼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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