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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Oct 08. 2021

본다는 착각

보고 있으나 보지 못했고, 보지 못했으나 보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침침...


게슴츠레 눈을 찌푸리고 눈동자에 잔뜩 기를 모아도 눈앞의 글 줄이 흐릿하다.

원체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전구가 하나 더 나간 것처럼 조금 더 흐릿하고 어두워졌다. 이렇게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는 것, 그것을 형상적으로 묘사해 낸 침침이란 단어는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 감탄하는 한편, 마음 한구석이 살짝 부서져 내렸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기능의 박탈을 의미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시 교정 수술을 받은 아들은 6개월에 한 번씩 시력검사를 받는다. 아들의 검사를 지켜보다 오늘은 나도 저 의자에 앉아야겠다는 마음이 불쑥 솟았다. 대충 안경만 바꿔 껴오던 것이 몇 년. 참으로 오랜만에 안과 검사대에 눈을 들이밀었다. 한참 내 눈을 들여다보던 의사가 대뜸 물었다.


"렌즈 껴보셨어요?"


"아... 예전에 소프트렌즈는 한번 껴본 적이 있는데 교정 효과도 없고 불편하기만 해서 관뒀어요."


"하드렌즈를 끼면 오른쪽 눈도 조금 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제가요? 30년 동안 안 썼던 눈인데..."


"더 오래 안 쓴 눈도 교정돼요. 한번 해보시죠?"


렌즈의 형태와 도수를 맞추기 위해 몇 번이나 렌즈를 갈아 꼈을까


"엇...!"


내 눈에 두 개의 상이 흔들리듯 맺혔다. 한 눈은 거의 기능을 못하기에 한쪽으로만 세상을 봐온지 삼십 년. 처음 경험해 본 두 눈이 함께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2주를 기다려 맞춤 제작된 내 렌즈가 도착했다.

새삼스럽게 렌즈를 관리해야 한다는 수고로움이 더해졌지만 흐릿하게 치우쳐 보이던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내 안의 방문을 열고 꾸물꾸물 기어 나오고 있었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렌즈를 눈에 넣고, 찌르는 듯한 이물감에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초점을 맞췄다.

먼 벽에 붙어 있는 시력검사표의 글씨가 하나 둘 읽어졌다.


"아아!"


안경을 끼고도 이렇게 먼 곳의 것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는 멀리서 걸어오는 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당황할 일도, 표지판을 읽지 못해 길을 놓칠 일도 없겠구나!


"엇 그런데 선생님, 왜 가까운 곳은 여전히 흐릿하죠? 오히려 더 안 보이는 느낌인데?"


"환자분 나이가... 노안이 올 수 있는 나이죠. 노안이 와서 가까운 곳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이제 눈이 노력해야죠. 눈을 자꾸 훈련시키면 가까운 곳도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 될 거예요."   


"......"





아침마다 화장대 앞에서 오늘의 일정을 복기한다. 눈을 멀리 두어도 되는 날인가, 가까이 두어야 하는 날인가. 전자라면 렌즈를 끼고, 후자라면 안경을 챙긴다.

우습고도 씁쓸하게도 아직까지는 먼 곳을 보려면 가까운 곳을, 가까운 곳을 보려면 먼 곳을 보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전엔 가까운 곳만 보고 먼 곳을 보지 못했다.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내 눈이 보는 것이 아닌 내 상상이 보는 별을 보곤 했다.

가까운 곳도 완벽히 또렷하게 보지 못했다. 종종 안경을 챙기지 않았고, 흐릿한 형상을 어림잡아 파악하는 것에 익숙해있었다.

나는 분명 보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보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아마 앞으로도, 심지어 노안까지 진행되고 있으니 나의 세계는 나날이 침침해지리라.



시각장애 어린이도 함께 읽을 수 있는 책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한울림어린이



시각장애어린이들과 그림책을 매개로 한 미술수업을 하기로 했다. 이 주제에는 이 책이 맞지, 그 책 참 아름답지, 어렵지 않게 머릿속으로 척척 기획해나갔다.

그런데 막상 그림책을 펼쳐 들고 내 눈이 보이지 않는다 상정한 순간 나에게 아름답게만 보였던 그림 속 디테일, 숨은 이야기, 색감의 오묘한 변주, 생생한 터치 같은 것들은 깡그리 사라지고 불친절한 텍스트 몇 줄만 간신히 남아 헐떡거렸다.


어딘가가 쿵하고 세게 내려앉았다.


서가를 처음부터 다시 훑기 시작했다. 한 번도 관심 갖지 않았던 책까지 한 권 한 권 꺼내봤다.

이번엔 머리가 아닌, 눈이 아닌, 손과 몸과 마음을 쓰려 노력했다 종이의 두께, 질감, 책의 크기, 무게, 팝업 같은 물리적인 장치들. 시각적 심상을 자극하는 선명한 단어와 세밀한 문장. 의성어, 의태어의 빈번한 사용 같은 것들......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눈이 아닌 상상으로 보는 것은 눈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것이었다.


내가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것.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것. 너무 가까워서,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지 않은 것.......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아마도,

본다는 행위의 수많은 아이러니만 잔뜩 보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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