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
정글 캠프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3개월이 흘렀다. 쉼없이(정말로 휴일이 없다..) 달려오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감사함과, 그러므로 더 지치면 안된다는 부담감을 번갈아 느끼면서 생활했다. 하루 이틀의 휴식이 능률향상에 큰 도움을 준다는 신념을 가진 나였지만 이곳에서 제시하는 스케줄에 맞춰보고자 휴일 없이 3개월을 지냈더니, 한번도 본 적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서울로 돌아왔다. 이틀의 휴식을 갖기로 했다.
처음 정글에 왔을 때, 나는 지나친 친밀감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운영진 분들은 동료들끼리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를 쌓는 것이 팀워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전 회사에서도, 그 전 회사에서도 수평적인 관계로서 서로 존칭을 사용하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매우 좋은 팀워크를 발휘하는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사적으로 친밀감을 쌓는 것이 오히려 팀활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특히 형, 누나, 언니,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 혹여 수평적인 관계가 깨질까봐 가장 무서웠다.
채용 프로세스에서 소위 말하는 컬쳐핏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개인의 가치관과 성향을 본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색깔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 색깔은 충분히 장점이 있고, 이걸 바꾸기에는 5개월은 너무 짧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의 방식을 선택했다. 동료분들과 '친구'는 되지 않으려고, 적어도 아주 천천히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훗날 팀으로 일할 때 수평적인 의사소통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친밀감을 원했고, 존칭 사용을 혼자만 원하는 것 같아서 나도 뒤늦게나마 분위기에 맞춰보기 위해 노력했다.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개발자 커뮤니티같은 분위기는 없었지만, 대신 대학교 선후배같은 정겨움이 강의실을 채웠다. 우리는 삼삼오오 스터디를 꾸리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함께 생활했다. 팀활동을 할 때 공적인 느낌의 피드백을 주고받기는 어려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캐주얼한 관계가 주는 재미도 꽤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했다.
몇번의 개인과제와 팀과제를 거쳐, 최근 시작한 핀토스 프로젝트에서 만들고 있는 미니 OS는 정교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많은 오동작이 발생하는 프로그램이다. CPU와 메모리의 특징을 이해해야 해서 다소 난해하고, 또한 주어진 시간 대비 작성할 코드 양이 적지 않아서 팀원들과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다. 1년차 주니어로 회사에 다닐 때는 내 역량보다 너무 높은 수준의 작업은 주어지지 않았다. 회사 입장에서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업은 코드 로직을 잘 설계하는지가 핵심이었기 때문에 난해함을 느낀 적은 많지 않았다. 가끔 메모리 누수 관련 버그나 워닝이 발생할 때 약간의 난해함을 느꼈었지만(지금 알고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것은 잠재적인 위험요소만 될 뿐 바로 앱의 오동작을 유발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성능이슈로 이어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 OS에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작성한 코드는 바로 에러를 발생시킨다.
장치의 구조를 완전히 이해 못하고 코드를 작성하면 에러가 나고, 에러를 잡기 위해 디버깅을 하려면 원인을 찾아야 하고,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장치를 이해해야 한다. 장치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더 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코드를 작성하지만 또다른 에러가 난다. 이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사라지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바로 이때 그전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넘어갔던 서로의 행동이나 사소한 실수 하나 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예민해지는 것이다.
최근에 정글에 강의를 와주신 한 개발자분께 예민해지는 순간의 대처법에 대해 질문드렸다. 그분은 즉시 그 대화를 중단하고 잠시 쉬어가라는 조언을 주셨다. 예민해진 상태에서 나누는 대화는 후회를 낳을 수 있다면서. 나는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는 경험을 처음 해봤고, 자칫 팀원에게 화풀이를 할뻔한 순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어쩌면 정글에서의 생활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너무 많은 버그 때문에 무력해진 걸까? 쉬지 않고 달려서 번아웃이 온 걸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걸까?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좌절감? 내가 가지지 못한 영리함을 가진 동료들을 향한 부러움과 질투? 아, 이것들 전부 다 해당되려나?
그래서 나는 잠시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지난 3개월에 대한 회고를 좀더 그럴 듯하게 기술적인 내용으로 해보고 싶었지만, 최근의 예민함을 돌아보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게 더 우선인 것 같았다. 혹시 이게 회사에서 일할 때 또 튀어나올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 잘 알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럴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찾아낸 해결방법은, 1. 잠깐 쉰다. 2. 좀 쉬고 나서 이렇게 글로 정리한다.
회사를 다닐 때는 왜 나에게 한번도 이런 모습이 없었을까? 돌아보면 그때도 업무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많았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고 팀원들끼리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도 많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선에서 업무에 필요한 피드백을 주기적으로 주고받았다. 친구가 아닌 직장동료로서, 주기적으로 주고받는 피드백이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감정이 쌓이는 것을 막아주었던 것 같다. 어차피 우린 친구가 아니고, 한사람의 일꾼으로서 그자리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지난 회사에서 경험했던 피드백 문화를 이곳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지, 동료들이 그걸 원할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 쉬면서 생각을 정리한 것이 나를 더 좋은 사람, 좋은 개발자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건강한 팀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언제나 진심이다. 개발은 결코 혼자할 수 없고, 나는 좋은 팀에서 일을 하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캠프가 끝나고 나면 다시 취직을 시도하고, 직장에 다닐 것이다. 그때 이시간에 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며 후회하지 않도록 고민은 그만하고 다시 프로그래밍에 몰두해야겠다.
Photo by Matt Dunc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