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것에도 자신하지 말 것
<장 작가 에세이>
이제 와서 승현은 모른 척 하지만 당시 그는 나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자, 영화 보자, 술 먹자 했다. 그렇게 열심히였던 일을 왜 지금은 모르는 척하는지 모르겠다.
승현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만나게 된 경위를 이렇게 말한다. 같이 일하던 TV 프로그램 작가 중 내가 눈에 띄었고 괜찮게 생각했는데 하필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그런데 마침 헤어졌다길래 위로해주다가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거라고.
전혀 아니다. 그 말의 진위를 떠나 승현은 미혼부였고 연예인이었다. 내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연애로 이어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승현의 질척거림이 한 달 정도 이어지고 (그렇다고 집요했던 것도 아니다. 시간 되면 만날래? 안된다 하면 ‘ㅇㅇ’ 이런 식으로 답장이 와 이거 뭐지 싶기도 했다) 나는 매번 거절하는 것도 불편했다. 엄마에게 김승현이 자꾸 만나자고 하는데 부담스럽다고 말하자 엄마는 걔가 너한테 사귀자는 것도 아닌데 왜 김칫국이냐고 말했다. 그 말이 솔깃했다. ‘그러게? 나 왜 오바지? 그냥 친해지고 싶은 걸지도~’ 그렇게 만날 약속을 잡았다.
승현은 일요일 3시 삼성역에서 만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자고 했다. 연예인과 사적으로 밖에서 만난다는 사실부터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냥 나갈 순 없어 미용실에서 드라이도 하고 외출 준비를 일찌감치 마쳤다. 그런데 문자가 와서는 촬영이 늦어진다며 5시에 보자고 했다. 뭐 그 정도야 기다릴 수 있지. 그런데 다시 7시…8시… 약속이 계속 미뤄졌다. 머리 드라이한 게 아까워 눕지도 못하고 있는데 짜증이 머리꼭지까지 올라왔다.
- 그냥 다음에 보죠.
- 아니에요. 오늘 꼭 봐야 해요.
뭐지? 아리송했다.
밤이 되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승현은 일단 자기가 촬영하고 있는 곳으로 오라 했다. 택시를 타고 빗속을 가르며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고분고분하라는 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승현은 90년대 잘 나가던 하이틴 모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혼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두가 충격받았다. 나이를 계산해보면 그가 고등학교 때 아이를 낳았다는 셈이 되는데 당시엔 그런 사실을 허용해 줄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쿨하지 못했다. 승현은 한순간 손가락질받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잊혔던 그는 살림남이라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에 딸 수빈과 출연하며 재개했다. 옥탑방에서 형편없이 홀로 사는 모습이었다. 짠했다. 실질적으로 수빈을 키운 승현의 부모님도 출연하셨는데 이게 대박이었다. 부모님은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한 삶에 비해 유쾌했고 순수했고 어머님은 고생한 여자라 믿기지 않게 예쁘셨다. 순전히 부모님의 활약으로 승현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빗길을 뚫고 승현이 오라는 곳으로 갔더니 살림남 촬영을 하고 있었다. 승현의 부모님 뿐 아니라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까지 뵙게 되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드리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드디어 밤 10시가 되어 승현과 곱창집에 마주 앉게 되었다. 승현이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하고 긴장됐다. 그런데 그는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같이 일하는 다른 작가와 피디들에 대해서 묻더니 나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짜증이 밀려왔다. 방송작가에게 쉬는 날이 얼마나 소중한데 종일 기다리게 하더니 웬 오지랖? 분했다. 나는 무슨 말을 기대했길래.
술이나 마시고 집에 들어가 잘 심보로 소주를 열심히 마셔댔다. 둘이 소주 4병을 비웠다. 내 주량은 소주 한 병 반이고 결혼해 살아보니 승현은 나보다 주량이 약하다. 당시 4병을 마셨으니 아마 둘 다 취했으리라. 그렇게 곱창집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뜸 승현이 이런 말을 했다.
“장 작가, 우리 사귈래요?”
나는 필사적으로 싫다고 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단 말인가. 저 남자는 취한 거다. 저건 주사다. 어머머…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뭘 안다고! 주사 참 참신하네.
개었던 하늘에서 다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지가 진심이라면 또 연락하겠지…… 난 그때, 다시 연락 오기를 바라고 있던 걸까? 지금 생각해도 내 마음이 언제 어떻게 그에게로 향했는지 모르겠다. 난 분명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부담스러웠는데. 마음이란 건 이렇게 순식간에 휙휙 노선을 바꿔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에게는 연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