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션디킴 Jun 22. 2019

대학교 졸업 일기

글로 정리해보는 지난 5년간의 여정

2019년 5월 19일 일요일


드디어 5년 대학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19살 때 시작해서 어느새 24살. 20대의 거의 절반을 이곳에 쏟아부었다니. 부모님 밑을 떠나 자취도 해보고, 하고 싶은 게 계속 바뀌어서 두 번이나 전과를 하고, 인턴쉽을 통해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경험해봤다.


나의 전공은 컴퓨터 사이언스였다. 요즘 한창 시끄러운 테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졸업반이 되어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 내가 속해 있는 커뮤니티에 대해 많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테크의 영향과 한계. 테크가 궁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의 좇음은 타당한가. 테크의 윤리성. 너무 새로운 것에 집착하며 우리는 집단적인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제일 중요한 질문. 이 커뮤니티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늘은 5년 동안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것들, 세상에 대한 나름 나만의 해석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




단절함으로 이루어진 우리 세상


시대정신은 그 당시 이론/기술과 아주 가까이 밀접돼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 철학과 유클리드 기하학, 계몽주의와 뉴턴의 물리학이 좋은 예시이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철학적 아이덴디티는 프로그래밍에서 온다. 그것의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프로그래밍의 이론적 기초를 쌓은 1920-30년 수학가들, 힐버트, 괴델, 튜링, 비튜겐슈타인을 보아야 한다.


이들은 단절된 요소를 가지고 완전한 인간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우리 세상은 유기적인 세상이다; 0과 1 사이에 무한한 숫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기호 논리학에선 0과 1을 거짓과 참으로 해석하여,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단절된 2가지 객체만 존재할 뿐이다. 허나 이것들을 조합해서 더 큰 숫자를 표현하고, 알파벳을 나타내기도 하고, 결국엔 하나의 프로그램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것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단절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했던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요즘 언어학과 인공지능이 뜨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철저히 단절된 요소들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단절된 단어들로 만들어진 우리들의 소통 방식, 단절된 개념들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밝혀내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큰 의문점이 생긴다. 내가 살면서 명확히 느끼는 감정들, 내 머릿속에 유기적인 관념들, 이것들을 정말로 분리된 단어들로 다 담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세계관은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 것일까?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나를 지원서와 이력서에 담는 것이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에게 말을 하는 행위는 생각이라는 생명체가 언어라는 시체로 바뀌는 과정, 일종의 죽음이다. 나의 생각은 유기적이지만 한번 내뱉은 언어는 바뀔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내 안에 있는 나의 실존은 완벽하고 고귀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나의 몸을 떠나는 순간 부패되고 타락된다. 생각하는 나와 표현하는 나 사이에 대립이 생긴다.


이는 필연적인 결론일 수도 있다. 알베르 카뮈의 "모든 방법론은 그 끝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말이 있다. 단절한 요소들을 전제한다는 것은 결국엔 단절된 소통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에 우리 자신을 놓아버렸다.


현대판 시지프의 신화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는 없다면,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나? 이 질문을 현대적으로 해석을 하면 아마 이렇게 되지 않을까.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침묵해야 하는 걸까?


대학교 때 나에게 궁극적으로 던진 질문이다. 내가 느낀 것과 내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취업을 위해 나 자신을 회사들한테 계속 인위적인 표현을 해야 할까? 각종 소셜미디어에서는 어떻게 나를 표현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는 나와 표현하는 나를 일치해야 하는 걸까?


침묵과 소통의 기로에서 나는 최대한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죄의식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는 신앙과 기도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을 벗어나고자 했다. 위에 말한 카뮈 역시 자살이란 결론에 빠지지 않고, 삶을 향한 투쟁을 통해 무의미한 삶에서 가치를 직접 창조해낸다. 둘 다 세상의 부조리를 인간의 궁한 노력으로 이겨냈다. 완벽한 소통이란 없어도 소통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결국엔 중요한 게 아닐까. 파스칼 키냐르가 말했던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끌지도 모르지만, 꺼진 불빛을 매번 다시 킬 수 있는 존재가 인간 아닐까.


돌고 돌아 정말 하고 싶었던 말.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취직과 커리어 문제 때문에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았으면 한다. 이 문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히 인간과 세계의 소통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완벽한 소통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당연한 마찰이다. 내 안의 실존은 여전히 완벽하다. 모두가 "생각하는 나"로써 자기 자신을 의심치 않고, "표현하는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면 좋겠다.


<비브르 사 비> (1962) - 장 뤽 고다르


2019년 6월 22일

한 달이나 걸린 졸업 일기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