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오 Jan 15. 2024

낙과의 맛있는 변신 : 애플크럼블머핀

추석 쯤이 되면 사과가 마트에 진열된다. 

큼직하고 껍질에서 윤기가 흐르는 사과들이 색깔로, 풋내로 매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이 맘 때가 되면 나는 사과를 가지고 여러가지 디저트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시나몬 향과 사과의 달큰함이 조화로운 애플 크럼블 머핀을 가장 좋아했다. 

크럼블의 바삭함을 즐기고 나면, 사과의 즙과 과육이 배어 보드라운 머핀이 혀에서 풀려내린다. 

애플 크럼블 머핀은 소위 말하는 “겉바속촉”의 대표가 아닐까? 

그만큼 겉과 속이 확연히 다른 텍스처를 만들기 위한 불 조절(?)이 까다로운 디저트이기도 하다.


올해는 유독 사과값이 비싼 해였다. 

맛있는 사과를 쟁여 두기 위해 장을 보러 갔더니 보통 사과 한 알에 2천원이 훌쩍 넘는 가격을 뽐내고 있었다. 장마가 길어 과수원에 탄저병이 만연했다고 한다. 

탄저병은 과실이 썩어들어가는 병인데 전염병이라, 한 그루만 탄저병에 걸려도 과수원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온다습한 환경은 탄저병 균이 아주 좋아하는 기후인데, 여름 내 비가 잦고 길었으니 아주 신이 난 모양이다. 

가격도 가격인데, 맛도 예년같지 않다는 기사들이 주르륵 쏟아졌다. 

청과물 코너 한가운데에서 사과 가격이 비싼 이유를 검색하다가, 기사들을 보고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10년 차 커리어를 멈추고 백수가 된 지 두 달째, 나는 결국 사과를 카트 안에 넣지 못하고 말았다. 


어느 날은 신랑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춘천 5일장을 구경가기로 했다. 

춘천 출신인 어머님은 가끔 풍물시장에서 열리는 5일장에 다녀오셔서 먹거리를 한 아름 안겨주시곤 했다.

이 날은 신랑의 휴무일과 장날이 맞아 든 덕분에 함께 나들이 삼아 춘천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님 팔짱을 끼고 잔뜩 쌓인 나물들, 둥글레차, 생밤, 메밀 전병들을 구경하며, 

필요한 것들을 착착 구매했다. 나도 베이킹에 쓸 캐슈넛을 싸게 구입하고, 방금 산 귤을 까먹으며 

어머님과 신나게 시장을 즐기고 있었다. 


© shelleypauls, 출처 Unsplash

시장 거리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쯤이었다. 

이 날 장에서 가장 커보이는 과일 행상의 바닥에 사과 탑이 바구니 위로 쌓여 있었다. 

언뜻 보니 사과가 대략 여덟 알쯤 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낙과 5천원] 이라고 쓰인 박스 골판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 개에 630원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생채기가 몇 군데 있는 것 빼고는 썩거나 홈이 파져 있는 사과들도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사과 바구니를 쟁취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도파민이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집에 데려온 그날의 전리품(?)을 먼저 싹싹 씻어서 조각조각 썰어냈다. 

썰면서 맛을 보니 당도는 떨어지지만 새콤한 사과의 향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사과 조각들과 분량의 유기농 설탕을 넣고 냄비에 끓이면, 

물을 넣지 않아도 설탕이 사과즙과 섞이면서 자박자박 물이 생긴다. 

이 물이 다시 사과에 쏙쏙 들어가도록 졸여주면 애플 크럼블 머핀을 만들 준비는 완료된다. 

머핀을 만들 만큼 정과를 덜어두고 나머지는 밀폐용기에 넣어 냉동실로 입장시키면 

겨우내 애플 크럼블 머핀을 만들어 먹을 준비가 완료된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만큼 마음이 든든하다. 

두유와 해바라기 씨유, 설탕을 잘 섞어 분리된 층을 없앤다. 

쌀가루와 감자전분, 아몬드가루를 체쳐 넣고 베이킹 파우더를 추가한다. 

아마씨를 불린 물과 사과 정과를 넣고 싹싹 섞어주면 머핀 반죽은 완성. 

머핀틀에 팬닝한 반죽위로 크럼블 반죽을 살살 뿌려주고 사과 조각들을 콕콕 박아 넣어준다. 

머핀틀을 오븐으로 넣어주고, 시간 맞춰 온도 조절을 해주면서 머핀 굽는 향기를 만끽하다 보면 땡, 

오븐이 제 할일을 다하고 휴식에 들어간다. 

식힘망에서 머핀이 형태를 잡아가는 동안 나는 차를 준비한다. 

흐릿하게 비가 오는 날의 오후라 운남백차를 우려보기로 한다. 


차가 준비되자 머핀도 적당히 따뜻할 정도로 온도가 내려갔다. 

머핀종이만 벗겨내고 크럼블과 머핀을 함께 아작, 베어문다. 

포슬포슬한 머핀에 사과향이 그득하게 들어있다. 

백차 한 모금에 젖어드는 머핀이 아스라하게 식도로 넘어갔다. 이번 베이킹도 대성공이다. 


낙과라고 시중 사과 가격의 반의 반값에 내놓아진 사과. 

조금만 정성을 쏟았더니 이렇게 맛있는 머핀으로 부활(?)했다. 

낙과 머핀을 맛있게 먹다 보니 문득 지금의 내가 낙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직장 생활을 멈추고, 비어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지금. 

여느 때처럼 이직을 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 지금의 나는, 

커리어 시장에서 뚝 떨어져 버린 낙과가 아닐까? 


돈을 벌지 못하는, 생산성 없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죄책감이 스스로를 벽에 몰아붙이면서도, 

선뜻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못할 것 같았다. 

상사의 메신저에 답장을 하다가, 이명과 함께 호흡곤란을 겪었던 나는, 

다음날 퇴사를 고하고 2주일 여 만에 책상을 정리하고 말았다. 

대표나 상사의 눈 밖에 나면 월급도 끊기는 직장인의 위태한 긴장상태, 

성과를 내더라도 작은 오피스 내 커뮤니티에 속하지 못하면 인정 받지 못하는 상황 속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낙과로 만든 애플 크럼블 머핀을 하나 뚝딱 해치워버리고 나니, 

툭 떨어져 버린 나도 탈바꿈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긴다. 

낙과를 정성들여 다듬고, 건강한 설탕에 졸여서 베이킹이 되면 최고로 맛있는 머핀이 된다. 

나도 스스로를 다듬고, 건강하고 맛있는 재료들을 더하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더 가치있는 무언가로 재탄생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낙과 상태였던 나에게 오늘부터 정성을 들여보기로 한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만의 머핀을 만들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꼭 그러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