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봉을 위아래로 놓고 사이에 작은 사이즈의 원형 케이크를 넣는다. 칼을 각봉 위에 뉘이고 케이크 윗부분을 손으로 살짝 눌러 잡은 뒤 가볍게 심호흡한다. 칼을 위 아래로 밀어 당겨가며 케이크를 잘라낸다. 휴우. 생애 처음 홀케이크를 만드는 마음이 콩닥인다.
서른 중반을 넘어선 딸이 회사를 나와서 두문불출하다가 불쑥, 비건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하고 말을 꺼냈을 때 아빠는 잠깐 눈을 멈추고 나를 뚫어져라 보았던 것 같다. 마흔 중반에 20년을 몸담은 회사를 나와 식당을 개업했던 날의 자신을 마주하고 계신 걸까. 한 숨을 내쉬던 아빠는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선.” 이라며 젓가락을 놓았다. 딸에게 하는 건지, 자신에게 하는 건지 모를 한탄이었다.
세 달여가 지나고 아빠의 생신이 도래했다. 지난 생신 때에 전동마사지기를 선물했다가, “앞으로 선물 사오면 너 안 만나!”라고 으름장을 받았던 터였다.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는 고집을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었던 나는,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내 생에 첫 홀케이크를.
당근케이크의 맛을 알게 된 건 꽤나 어른이 된 후였다. 디저트 카페에서 케이크를 고를 때면 “굳이 당근이 들어간 케이크를..? 도대체 무슨 맛으로…?”라며 으레 선택지 저편으로 밀어 놓고 딸기나 자몽이 화려하게 올라간 과일케이크나 꾸덕한 초코케이크를 고르곤 했다. 아마도 누군가 미리 주문해둔 당근케이크를 한 입 먹어본 게 첫 만남이었던 것 같다. 스릴러 영화의 반전을 맞이한 것처럼 놀라웠던 감각만은 생생하다. 당근의 풋 내 대신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따뜻하게 입 안을 감싸 안았다.
당근케이크 속 재료들은 제 역할이 분명하다. 당근은 부드러운 단맛을, 피칸이 고소함을, 시나몬이 따뜻함을 담당한다. 윗면과 사이사이 채워진 크림이 이 모든 역할을 어우러지도록 보드랍게 퍼져나가며 풍성함을 더해준다. 아이보리색 크림이 채워진 갈색 케이크.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는 그 속에 조화롭고 편안한 만족감을 가득 품은 당근케이크. 내가 아빠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틀 전부터 준비한 캐슈크림을 짤주머니 속에 그득 채웠다. 동물성 생크림을 휘핑하면 빠르게 크림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이건 내가 아빠에게 처음 선보이는 비건케이크니까. 캐슈넛을 하루 동안 물에 불리고 레몬즙과 시럽, 코코넛 오일을 넣어 곱게 갈아준다. 냉장고에 넣고 크림이 어느 정도 단단해지면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 짤주머니로 시트 위에 크림을 돌려가며 짜주고는 스패츌러로 겉면을 정리해준다. 초보자라 아직 돌림판도 케이크 나이프도 없지만 나름의 예술적 감각을 더해보려고 모양을 낸다. 케이크의 지름을 피칸 조각들로 둘러주면 첫 당근 케이크 완성이다.
피자 세이버 위에 넓은 유산지를 꽂아 넣고 당근케이크를 올렸다. 남편에게 안전 운전을 거듭 부탁하고 나는 보조석에서 케이크 상자를 꼭 끌어 안고 있었다. 아빠가 사는 시흥까지 한시간 반. 운전자보다 더 긴장한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안도의 한숨 대신 마중나온 아빠를 크게 불러본다.
“아무것도 사오지 말랬지? 니네 다시 가!”
손에 든 상자를 보고 역정부터 내는 팍팍한 어르신. 지하주차장 한복판에서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이거 내가 만든 거야. 비건당근케이크. 아빠의 눈이 놀라움에서 기쁨으로 바뀌어 차는 것을 본다. 그제야 딸을 안아주는 아빠의 등을 나도 꼭 맞잡는다. 비건 디저트 그거 누가 찾아 먹기는 하냐던 아빠는 케이크를 꺼내자 두 조각을 말끔히 비웠다. 질리지 않고 편안한 맛이라고 정확히 평가까지 해주셨다.
단단한 인상의 아빠는 거친 전라도 억양에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면모가 있는 사람이다. 딸에게 서운하다고 3년 간 연락을 끊어버리기도 했던 아빠.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인사도 제대로 못한 사위를 식장에서 처음 만나고도 “대번에 착한 놈인지 알아봤다.”면서 누구보다 사위 사랑이 끔찍한 아빠. 만날 때마다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넘치게 눈으로 보여주는 아빠는 내게 당근케이크 같은 사랑이다. 익숙한 재료로 만든 투박해보이는 당근케이크. 그 안에 따뜻한 맛은 모조리 품고 있어 늘 감동을 주는 당근케이크를 선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당근케이크 같은 아빠의 딸이어서, 비건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이어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