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나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거의 정확하게 2년 전에 은퇴를 했다. 장장 36.5년이라는 세월을 쉴 사이 없이 달리고 은퇴선수가 된 것이다. 첫 번째 직장을 1년을 다니다 다음 직장으로 바로 이직한 후에 35년 6개월을 근무했으니 뻔한 월차나 휴가 빼고는 공백기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게으르고 친화력 부족하고 쉽게 싫증을 내는 내가 그 세월을 지나온 것이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은퇴 후 직장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나름대로의 교훈을 모아서 책을 한 권 집필했고(이것도 놀랍고 대견하다) 가끔 특강도 다녔지만 점점 '공식적'인 일정들은 소멸되어 가고 있다. 책 소개는 기회가 있을 때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곳에서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한 의도와 동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은퇴 후의 삶을 꿈꾼다. 나도 한 때는 책상 앞가림판에 쇼생크 탈출 포스터를 붙여놓고 여유자작한 은퇴 이후의 안락한 삶을 그리고는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단기간에 빡세게 일하고 일찍 은퇴하는 파이어족의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은퇴 이후의 일없는 삶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은 힘들고 거칠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이며 페르소나이고 부캐이기도 하다. 게으름을 수반한 만족감은 생각보다 짧게 끝나고 그 이후에는 편안함 보다는 갑자기 정체성을 잃은 것 같은 낭패감이 밀려든다. 누군가의 명함을 받았을 때 내 명함을 건넬 수 없는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당혹감이다. 초반에는 지난 시절의 연분으로 맺어진 많은 사람들과 위로와 격려의 만남을 가지면서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말을 실감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인간이 왜 사회적 동물인지 슬슬 실감이 나면서 누구나 겪어야 할 외로움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은퇴 이후의 삶도 계획이 필요하다. 직장에서 주간, 월간일정을 짜듯이 백수도 계획이 필요하다. 계획이 없으면 시간은 무료해지고 삶도 막막해진다. 해외여행 같은 크고 도전적인 프로젝트성 계획도 필요하지만 매일매일의 사소한 일상을 의미 있게 이어가는 루틴형 계획이 더 중요해진다. 풍족해진 세상에서 생각보다 할 것이 많아 보이지만 시간과 체력, 경제적 상황을 대입해 보면 많은 것이 탈락하게 된다. 말장난 같지만 계획을 위한 계획이 필요하다.
내가 추구하는 계획은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다. 특별한 활동을 떠나서 소소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내고 순간순간이 의미 있는 궤적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런 발견을 통한 작은 가치들을 기록하고 부담 없이 공유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대단한 것은 없다. 옅은 미소와 끄덕거림 같은 작은 공감이 있다면 공유의 가치는 충분하다.
자, 길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