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입대 - 당신과는 천천히
25여 일은 날아가듯이 갔다. 본격적으로 사귀기로 한 우리는 짧은 남은 시간만큼 열심히 만났다. 롯데월드를 가서 내 자유이용권까지 척척 사주고 이동시에도 택시만 타는 그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알고 보니 다 내 과외비였지만.) 이게 대학생의 세계인걸까. 그리고 첫 키스. 정말 이 지구에 우리 둘만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단 5분만이라도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그리고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999년 5월 31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울었다. 친구들은 걱정했고 선생님은 몸이 안 좋으면 조퇴하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울고 또 울고... 그렇게 그날이 갔다.
그의 입대와 동시에 나의 고무신-그 당시 군인의 여자 친구를 그렇게 불렀다-생활이 시작되었다. 유니텔에서 '아기방-아름다운 기다림이 있는 방'이라는 고무신 모임에 가입을 했다. 용기를 내서 정모도 나가서 서로 용기도 주고받고 그중 제일 어렸던 나는 언니들에게 이쁨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한 명 두 명 떠나서 나만 남고 말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많아지고 나간 사람도 많아졌다.
그 당시 난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가 가능한 주말이 되면 집에서 꼼짝도 안 하고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 시간을 유일하게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의 전화와 우체통에 꽂힌 그의 꼬부랑글씨가 적힌 하얀색 봉투였다. 전화와 편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처음부터 과외 선생님이었고 사귀고 나서도 바로 군대를 가서 내가 일방적으로 그의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수동적인 나는 우리 관계에 있어서 더욱더 수동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구부러진 자세로 오래 있다 보면 휘어진 채로 굳어버리는 관절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고착되어 버렸다.
드디어 면회가 가능해지고 기다리던 첫 면회. 나는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머리를 반 묶음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구로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아현 전철역 화장실에서 그 이른 시간에 만나 머리를 묶어 달라고 했다. 고맙게도 그 친구는 휴일 그 이른 시간에 구로에서부터 와 줬고 우린 아현역 화장실에서 나름 연예인 대기실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꾸미고 또 꾸몄다. 그만큼 예뻐 보이고 싶었고 예쁘고 싶었다.
면회가 가능해지자 난 거의 매주 면회를 갔다. 일요일 아침 1호선. 사람도 별로 없는 스텐 색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파란색 의자에 드문 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 난 그 1호선이 좋았다. 종로 5가를 지나서부터 회기역부터는 지상구간이라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 오전 들어오는 햇살, 조금 있으면 그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설렘. 따스한 기운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입구 위병소에서 이름을 적고 면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까매진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껏 웃으며 그가 나타났다. 그에게서 나는 군복 냄새가 난 정말 좋았다. 약간은 퀴퀴하지만 남자다운 냄새랄까. 그리고 늘 면회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처럼 금방 가버리고 난 눈물이 나지는 않지만 울고 싶으면서도 멍한 심정으로 집에 오곤 했다.
수능이 끝났다. 대학은 SKY 아니면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점수로 갈 곳을 찾다 보니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환상 속에 살고 있었고 현실은 냉엄했다. 결국 외곽에 있는 대학교의 생각도 없던 정치외교학과를 썼고 대학에는 붙었으나 너무나 먼 거리에 일주일 만에 지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내가 다니는 학교를 부끄러워하며 말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재수를 하겠다고 했고 우리 집에선 정말 이례적으로 아버지는 허락하셨다. -이 또한 언니들의 미움을 샀다.- 재수를 하고 재수학원을 다니는 것. 우리 집에서 이는 엄청난 특혜였기 때문이다.
'2호선을 타자. 그리고 멀지 않은 곳으로 가자. 그리고 간판을 따자.'
당시 내 재수 모토였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어디 학교 다니냐고 물어보면 말할 때 부끄럽지 않은 대학을 가자.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재수를 하면서도 매주 면회를 갔다. 그러다 보니 면회를 너무 자주 가서 가는 길에 면회가 잘린 적도 몇 번 있었다. 하루는 창동역 즈음인가를 지나가고 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통상적 면회 규칙은 한 달에 한 번이 규정인데 내가 매주 면회를 가서 오늘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 얼마나 울면서 집에 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럼 다음 주에 보면 되는데 참 나도 극성이었구나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