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de Feb 06. 2022

나의 이혼이야기.04

04.입대 - 당신과는 천천히

 25여 일은 날아가듯이 갔다. 본격적으로 사귀기로 한 우리는 짧은 남은 시간만큼 열심히 만났다. 롯데월드를 가서 내 자유이용권까지 척척 사주고 이동시에도 택시만 타는 그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알고 보니 다 내 과외비였지만.) 이게 대학생의 세계인걸까. 그리고 첫 키스. 정말 이 지구에 우리 둘만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단 5분만이라도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그리고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999년 5월 31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울었다. 친구들은 걱정했고 선생님은 몸이 안 좋으면 조퇴하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울고 또 울고... 그렇게 그날이 갔다.


 그의 입대와 동시에 나의 고무신-그 당시 군인의 여자 친구를 그렇게 불렀다-생활이 시작되었다. 유니텔에서 '아기방-아름다운 기다림이 있는 방'이라는 고무신 모임에 가입을 했다. 용기를 내서 정모도 나가서 서로 용기도 주고받고 그중 제일 어렸던 나는 언니들에게 이쁨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한 명 두 명 떠나서 나만 남고 말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많아지고 나간 사람도 많아졌다.


 그 당시 난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가 가능한 주말이 되면 집에서 꼼짝도 안 하고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 시간을 유일하게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의 전화와 우체통에 꽂힌 그의 꼬부랑글씨가 적힌 하얀색 봉투였다. 전화와 편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처음부터 과외 선생님이었고 사귀고 나서도 바로 군대를 가서 내가 일방적으로 그의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수동적인 나는 우리 관계에 있어서 더욱더 수동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구부러진 자세로 오래 있다 보면 휘어진 채로 굳어버리는 관절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고착되어 버렸다.







 드디어 면회가 가능해지고 기다리던  면회. 나는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머리를  묶음   몰랐다. 그래서 구로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아현 전철역 화장실에서  이른 시간에 만나 머리를 묶어 달라고 했다. 고맙게도  친구휴일  이른 시간에 구로에서부터  줬고 우린 아현역 화장실에서 나름 연예인 대기실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꾸미고  꾸몄다. 그만큼 예뻐 보이고 싶었고 예쁘고 싶었다.


 면회가 가능해지자 난 거의 매주 면회를 갔다. 일요일 아침 1호선. 사람도 별로 없는 스텐 색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파란색 의자에 드문 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 난 그 1호선이 좋았다. 종로 5가를 지나서부터 회기역부터는 지상구간이라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 오전 들어오는 햇살, 조금 있으면 그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설렘. 따스한 기운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입구 위병소에서 이름을 적고 면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까매진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껏 웃으며 그가 나타났다. 그에게서 나는 군복 냄새가 난 정말 좋았다. 약간은 퀴퀴하지만 남자다운 냄새랄까. 그리고 늘 면회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처럼 금방 가버리고 난 눈물이 나지는 않지만 울고 싶으면서도 멍한 심정으로 집에 오곤 했다.




 수능이 끝났다. 대학은 SKY 아니면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점수로 갈 곳을 찾다 보니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환상 속에 살고 있었고 현실은 냉엄했다. 결국 외곽에 있는 대학교의 생각도 없던 정치외교학과를 썼고 대학에는 붙었으나 너무나 먼 거리에 일주일 만에 지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내가 다니는 학교를 부끄러워하며 말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재수를 하겠다고 했고 우리 집에선 정말 이례적으로 아버지는 허락하셨다. -이 또한 언니들의 미움을 샀다.- 재수를 하고 재수학원을 다니는 것. 우리 집에서 이는 엄청난 특혜였기 때문이다.


 '2호선을 타자. 그리고 멀지 않은 곳으로 가자. 그리고 간판을 따자.'


 당시 내 재수 모토였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어디 학교 다니냐고 물어보면 말할 때 부끄럽지 않은 대학을 가자.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재수를 하면서도 매주 면회를 갔다. 그러다 보니 면회를 너무 자주 가서 가는 길에 면회가 잘린 적도 몇 번 있었다. 하루는 창동역 즈음인가를 지나가고 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통상적 면회 규칙은 한 달에 한 번이 규정인데 내가 매주 면회를 가서 오늘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 얼마나 울면서 집에 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럼 다음 주에 보면 되는데 참 나도 극성이었구나 싶은 것이다.



이전 04화 나의 이혼이야기.0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