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추구하는 사계절에게서
낭만을 가벼이, 얕게 흉내 내는 걸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 모임은 사계절로 불리는데,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단지 네 명이어서 사계절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중 가을이다. 가을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다지 가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가을을 맡게 되었다. H는 봄과 환절기를, L는 여름을, J는 겨울을 맡고 있다. 환절기는 H가 비염이 있어서 매 환절기마다 알레르기 고통을 받기 때문에 하나 더 얹어주었다.
사계절을 대학에서 만났다. 대학에서 마음 맞는 친구 만나기 어렵다는 사람들의 경험들을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 경험하지 못했는데 아쉽지 않은 일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장난으로 우리는 네 명이니 사계절이야, 라는 말을 했을 때 오글거려하면서도 서로의 계절을 지어주는 우리 모습이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아주 오글거리지만, 아주 낭만적이었다.
네 명이어서 사계절이 착 들어맞듯이, 네 명은 사계절처럼 정말 다르다. 오죽하면 '네가 H, L, J랑 놀아? 왜?'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넷은 정말 다르다. 그럼에도 어울릴 수 있었던 건 각 계절의 다름을 알기 때문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넷은 낭만을 얕게 흉내 내는 것을 아주 잘한다.
영화가 그려내는 낭만적인 모습들을 우리는 아주 얕게, 가볍게, 흉내를 낸다. 누가 보면 참 우습게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낭만적인 걸 조촐하게 해낸다. 낭만이니까 조촐하다고 표현하기 싫으니 얕다고 표현하기로 한다. 우리는 낭만을 얕게 흉내 낸다. 이를테면, 아래 사진과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침 바다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 흉내. 바다가 나오는 영화라면 바다 옆에서의 브런치 장면은 대부분 나오니까. 낭만을 얕게 흉내 내는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와인이다. 와인은 분위기를 만드는 힘이 있다. 격식 있는 레스토랑에서만 먹을 것 같은 와인을 가볍게 페스티벌에서, 한강에서, 바다 앞에서 먹으니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다. 조촐하고 웃기지만 나름의 멋이 있다. 그 나름의 멋이 낭만을 얕게 흉내 내고, 와인을 많이 마시다 보면, 이게 낭만이지 하고 착각하게 된다.
낭만은 대부분 연인에게서 찾으라고 학습된 것 같다.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라디오에서, 책에서 하도 그러길래 친구들에게는 낭만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낭만을 사계절을 맡은 친구들에게서 배웠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낭만을 착각하는 걸 수도 있다. 조촐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얕은 낭만일지라도, 각 미디어에서 숨 쉬듯이 뱉어내는 낭만의 흉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흉내가 아니고, 착각이 아니니까, 낭만이니까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