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딸이 출근 준비를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정장을 입었다. 오늘 첫 날이다. 8시 20분, 문을 열고 나서는 딸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며 안아주었다. 오랜 시간 마음 고생한 딸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내일도 건강히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기를 바란다.
딸을 보내고 잠시 울컥한 마음을 가다듬고 나도 문을 나선다. 딸의 퇴근 시간까지 혼자 런던을 돌아다닌다. 지하철도 사람도 조심 조심 하라고 딸은 걱정했지만 나는 차가운 아침 바람이 반갑다. 건물 옆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초록색 District Line을 타고 다음 역 Tower Hill에서 내렸다. 구글 지도를 따라 걸으니 천 년 전 세워진 요새, 런던탑 (Tower of London)이 보인다.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들 사이로 한적한 런던탑을 향해 걷는다.
런던탑을 지나 10분 정도 걸어 타워브리지 ( Tower Bridge)에 도착했다. 다리 아래 산책코스가 있지만 다리 위에도 아래에도 이른 시간이어서 출근하는 사람들뿐이다.
타워브리지를 건너 강을 따라 걷는다. 사우스워크 성당(Southwark Cathedral)까지 구글 지도로 15분이다. 천천히 강을 보며 걷는다. 런던교에 도착해서 길을 건너 사우스워크 성당을 앞에 두고 입구를 찾지 못해서 헤매다 뒤쪽에 성당 입구를 찾았다. 사우스워크 성당은 저녁 예배 합창과 성체 예식으로 유명한 고딕 양식의 성공회 대성당이다. 입장료를 내고 성당으로 들어가니 성당 한가운데 달이 떠 있다.
Luke Jerram의 설치예술 'Museum of the Moon'이다.
저녁에 성당을 방문해 어둠 속 달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둘러보는데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성당을 돌아다닌다. 어색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안내하는 듯 보이는 고양이가 신기해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고양이의 이름은 'Hodge' 농부 고양이란다. 유기고양이를 성당에서 받아들여 성당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성당의 기념품 상점에서 고양이의 멋진 사진이 담긴 내년 달력과 사진들을 구입했다.
(검은 고양이 Hodge)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사우스워크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나 합창을 듣고 싶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려 성당 앞에 유명한 버러마켓((Borough Market)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영국 최고의 식료품시장을 맛보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Borough Market
시장 근처에서 구글 지도를 찾아 10번 버스를 탔다. 천천히 사우스 뱅크를 지나고 램버스브리지를 건너 Chelsea College of Arts를 지나서테이트 브리튼 정거장에서 내렸다. 눈앞에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이 있다. 보고 싶은 그림을 떠올리며 감정이 벅차오르는 순간 갑자기 너무 배고픈 현실을 깨달았다.
일단 점심을 든든히 먹고 체력을 갖추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구글지도로 피시 앤 칩스 가게를 찾고 테이트브리튼 뒤편의 동네를 걷는다. 15분쯤 걸었을까. 조용한 주택가 끝에 시장과 상점들 사이 가게에 들어가 고열량의 피시 앤 칩스와 레모네이드를 먹고 나왔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마시고 테이트 브리튼에 들어간다.
테이트 브리튼은 테이트 갤러리 중 500년 영국미술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영국의 대표 미술관이다. 궁전 같은 고풍스러운 내부로 들어선다. 조용하고 따뜻하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터너 갤러리를 지나 다른 방에 터너의 그림과 로스코의 그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별히 전시 공간을 꾸민 듯했다. 마크 로스코는 터너를 존경했으며 터너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Mark Rothko / Untitled c. 1950-2
JMW Tuner / Norham Castle, Sunrise
터너의 작품과 로스코의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 중에 기대했던 테이트모던에 있던 로스코의 작품들이 파리 루이뷔통 재단 전시를 위해 당분간 런던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나와 같은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한 작은 전시일지도 모르겠다.
테이트 브리튼에서 만날 수 있는 라파엘전파의 그림 중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다. 이 작품을 위해 테이트브리튼에 올 수 있다. 오필리어의 손에 든 양귀비 꽃과 강가의 풀들 그리고 죽어가는 여인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고 애잔하다.
John Everett Millais / Ophelia
라파엘전파의 그림 중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샬롯의 처녀' 그림 또한 만날 수 없었지만 테이트 브리튼의 보석 같은 작품들을 찾아 걷는다.
아일랜드 출신 표현주의 거장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과 영국 조각의 일인자인 앙리무어의 조각 작품을 함께 전시한 공간이 있다.
루시안 프로이트의 작품도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도 그리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그림 앞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
George Frederic Watts / Hope
두 눈을 가린 여인의 손에 단 한 줄만이 붙어있는 악기가 있다. 희망을 붙잡으려는 여인의 모습과 푸른색의 화면이 숨을 멈추게 만든다.
미술관에서 나와 정문에서 템즈강변을 따라 걷는다. 멀리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보인다. 조용하던 강가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지하철을 타고 카나리 와프 역에서 나오니 런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출근 첫날을 마치고 퇴근하는 딸과 만났다. 약간 상기된 듯 보이는 딸과 일본 음식점에서 따뜻한 라멘과 교자로 저녁을 먹었다. 딸은 오늘 나의 일정을 듣고 놀라며 웃었다. 춥지 않은 런던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