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홀로보다는 함께인 이유
떠난다.
슬픈 감상이 드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언제 들어도 설레는 동사다. 신묘한 감흥에 젖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 나는 어딘가로 떠나는 기분을 좋아한다. 전문적으로 여행하는 프로여행러들 앞에서 여행=특기라는 명함을 내밀지는 못하지만 떠나는 기분만은 정말 좋아한다. 어쩌면 이국의 풍경 자체보다도 짐을 챙겨 떠나는 기분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스페인으로 떠났다. 홀로였다. 졸업 후 예상치 못하게 흘러흘러 입사한 직장에서 헤매고, 오래 만났던 사람과의 관계는 끝이 예고됐었다. 나 자신에게 날 서있고 뾰족뾰족하고 자만했던,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였던 그때, 나는 갑작스럽게 홀로 여행을 택했다. 여행지는 이십대 초반 배낭여행을 돌았을 때 남쪽 구석에 있어 제외되었던 스페인이었다. 눈 앞에 닥친 현실에 잠식되어 웃음기를 빼앗긴 삶의 터전과는 다른 생경한 공간에서 순수하게 감탄하며 내 처지를 낙관하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오면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있길 소망했었다. 저녁형 인간인 내가 무슨 뽐뿌가 와서인지 스페인에서 아침 7시면 절로 눈이 떠졌다. 미술관 천국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돌며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후안 미로와 같은 거장들과 표현주의-청색파-큐비즘에 이르는 작품들을 훑고 다녔다.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서 오로지 게르니카 작품 하나에 2개의 방을 헌사한 규모의 전시에 전율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치안이 위험한 곳이라 말리던 바르셀로나의 Raval 거리를 매일같이 찾아갔다. 그곳에는 바르셀로나라는 합집합 안에 빈티지와 70년대 실종한 히피와 이슬람이 거칠게 섞여 있었다. 각개 거리와 상점들이 소우주였으며, 모든 풍경은 나의 사각 프레임 안에 담겨 돌아왔다.
바르셀로나 뒷골목은 갤러리 천국이었다. 몬트카다, 프린세사 거리, 프랭크 뮬러 미술관으로 향하는 고딕지구의 개인 갤러리들을 구경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갤러리에서 발을 멈췄다. 윤곽이 희미해 몽환적인 붉은 톤의 그림들. 자연스레 마음이 이끌려 갤러리 안을 둘러보다 갤러리 안에 있던 작가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에스페르였다. 여행객에게 친절하게 다가와준 그 덕분에 용기를 내어 손짓 몸짓을 섞은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자신도 무엇 때문에 그리고 있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오로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빨강과 회색빛을 교차로 쓴다고 했다. 나는 그의 작품 앞에 멈춰서 시간을 들여 보았고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흔쾌히 자신의 자화상 옆으로 가 다정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고 내면의 감흥이 샘솟던 스페인 여행. 그러나 여행이 뜻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날씨만큼은 ‘최강 맑음’ 스펙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볕 좋은 공원들을 다닐 때마다 마음 한쪽에는 헛헛함이 비집고 들어왔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이 연상되는 구엘 공원에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인과 함께였다. 자연히 나의 가족, 친구들과 함께 거니는 상상을 했다.
급기야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급행열차는 반시간 정도를 달린 후 멈춰 섰다. 사회 초년생이 큰 맘먹고 시간을 아끼려 끊은 값비싼 이 급행열차는 3시간 내 마드리드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열차는 한 시간을 정차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의 스페인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나는 옆자리에 앉은 스페인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랩탑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섹시하게 슈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었지만 Thank you 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문외한이었다. (바르셀로나인들은 정부의 폐쇄정책으로 인해 과거 100년간 영어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가 기계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손수 구글 번역기를 돌려 이 상황을 알려주었다. 번역 화면에는 이 구역에 산불이 나서 열차가 멈췄다고 적혀있었다. 더 이상 열차 운행을 못하고 다른 곳에서 버스로 갈아타야 하지만 그건 방송으로 계속 업데이트될 예정이라고 했다. 보아하니 돌발 상황에서 나오는 방송이라 모국어만 흘러나오던데... 나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열차칸을 다니며 현지인들 사이에서 서어와 영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외국인을 찾아다녔다. 그때 내 손을 잡아준 건 스페인 소녀였다. 그녀는 천천히 다음 방송을 영어로 통역해주었다. 환승버스 정거장의 위치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드리드가 아닌 다른 지역을 향하는 중이라 함께 갈 수 없었다. 이때부터는 나는 행선지가 같은 미국인 여행객들을 만나 함께 마드리드행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열차를 나서던 걸음에 산불을 알려준 스페인 남성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눈을 찡긋하며 무사히 도착을 기원하는 손인사를 해주었다. 이윽고 정거장 같은 푯말에 도착하자 환승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작은 체구에 캐리어를 들고뛰느라 속도가 늦었고 바로 앞에서 탑승 인원이 차 버리는 바람에 번번이 버스 탑승에 실패했다. 깔깔거리며 함께 짐을 들어주며 달려가 올라타는 동년배로 보이는 일본인 여성들이 부러웠다. 드디어 버스에 탔을 때 나는 이 버스가 마드리행인지를 재확인했고, 자리에 함께 올라탄 할머니들이 밝은 미소로 끄덕여주었다. 버스에 앉자 현타가 엄습했다. 마드리드 저녁에 도착해 플라밍고를 보는 일정을 날렸고 다소 위험한 시간대인 새벽 3시에 도착하게 되었음을 깨달으며, 화를 가라앉혔다. 현지인들은 버스에 타자 자신들의 일정이 지체되었음을 잊고 박수를 추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스페인 시민들 품성에 다시 한번 놀랐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버스 차창에 기대어 내려앉는 석양을 보게 되자 숱한 상념들이 스쳐갔다. 찬찬이 상황을 복기해보니 이 낯선 곳의 돌발상황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덕분에 나는 무사했다. 번역기를 돌려 천재지변을 일러준 스페인 남성, 지그시 내 손을 잡고 방송을 통역해준 스페인 소녀, 정류장까지 함께 가준 미국인 여행객들, 마드리드행 버스를 확인해 준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친구끼리 캐리어를 끌어주며 간발의 차로 나보다 먼저 버스에 올랐던 일본인들을 부러워했던 나를 상기해보았다. 그때서야 스스로도 완전하고 강하다고 여겼던 오만을 조금은 내려놓았다. 결국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며, 타인으로부터 배우고 보호받고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부끄러워졌다. 어쩌면 온전히 나만이 깨달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건 거대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선의와 작은 도움들이 쌓여 낯선 곳에서 나는 안전하게 마드리드로 향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그 해, 숀 펜이 감독한 영화
<Into the wild>를 보았다. (스포일러 포함)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작품으로는 우수하다고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루키도 작품의 우수함과 마음의 불을 당기는 작품은 다르다고 했던가. 실화라는 감동은 있지만 줄거리로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 영화의 엔딩씬을 보고 이상하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주인공은 미국을 횡단하는 배낭여행자이다. 우수생으로 학교를 졸업한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은 성(Family name)을 거부한 채 방랑자의 이름으로 알래스카에 도달해 야생에서 모두로부터 고립되어 자유와 진리를 찾는 것을 목표로 떠난다. 여행 중에 정착할 것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극지방에 다다랐을 때, 그에게 닥친 것은 추위와 굶주림 그 자체였다. 종착지에 머물며 그가 사로잡혔던 것은 그가 추구해오던 반항적이며 실험적 삶속의 자유보다도 알래스카로 향하던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의미였다는 사실은 일종의 반전이었다. 결국 삶의 마지막에 그를 붙잡은 건 길의 종착지에 특별히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찾으러 간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찰나지만 뜨거웠던 사랑과 진득해진 우정, 돌아온 곳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는 결국 극지방에서 식중독에 감염된 채 표류되어 죽음을 맞는다. 죽음 직전에 그가 유서로 남긴 유명한 문구 역시 실화다.
“Happiness is only real when shared”
(행복은 나눌 때에 진정해질 수 있다)
이제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비록 여행지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고, 취향차로 인해 일정을 일부 포기하게 되더라도. 멋진 여행풍경보다 누구와 그 풍경을 향유하며,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가 더 마음에 남는 것임을 공감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몸소 깨닫기까지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왜? 나는 지독한 경험주의자니까. 그럼에도, 누군가 인생의 화양연화가 언제였는지 중간 결산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할 것이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홀로 스페인으로 떠났을 때라고. 그때처럼 아무 목적 없이 보이는 그대로의 것들을 전부 흡수하려 했고, 순수히 앎의 기쁨을 즐긴 적은 드물 것이다. 호기심이 충만하여 스펀지 같았던 이십대, 혼자, 떠나고 싶었던 적기라는 삼박자가 맞은 여행이었다. 물론 아직도 새로운 풍경을 만나면 길이 트인 산책로를 만난 강아지처럼 들뜨는 것은 사실이지만, 점점 일정을 짜는데 게을러지고,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현장에서 새로운 지식을 담는 것도 버거워졌다. 새 풍경들이 이전에 다녔던 여행지들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감흥의 크기도 나이와 경험치에 조금씩 반비례해 간다는 것을 어느덧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여행이 질리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로 오랫동안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했다. 지금도 명백하게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것이 국내든 해외든 짧든 길든 굳이 사서 고생을 한다 해도, 여행으로 얻는 감흥과 생경한 곳에서의 나를 3인칭으로 응시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일만큼 독보적인 경험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딘가를 다녀와서 내 안의 본질적인 무언가가, 당면한 현실이 바뀌었을까라고 자문해본다면 단연코 아니다. 떠나온 후에도 내가 처해있는 현실은 아쉽게도 한 움큼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느끼게 되는 상념이 하나 있다. 여행은 현재 내 터전, 돌아갈 곳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종의 의식(ritual)이라는 것을. 돌아갈 곳이 있기에 ‘떠나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도 말이다.
스페인을 홀로 떠날 때보다 조금 더 자란 나는
조용필의 곡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가사에서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대목을 자주 떠올린다. 그럼에도 나는 여행 간 간격이 벌어질 때면,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가 찾아올 때면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사람이다. 낯선 곳의 생경함을 통해 나를 돌아보면서, 무한히 작은 존재임을 느끼면서, 돌아갈 곳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서.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이 당연한 깨달음을 굳이 해외를 다녀가며 값비싼 의식을 치르려고 하는 걸까.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그건 아마 나의 무지와 비이성적인 어리석음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언젠가 불혹, 그리고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 어딘가로 향하지 않고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으려나.
글쎄... 아마 그때까지 나는 이 어리석은 행위를 계속해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