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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Jul 10. 2019

2020년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우주의 원더키디>를 기억하며

초등학생 때 종종 열렸던 상상의 미래 도시를 그리는 대회들은 모두에게 익숙한 기억일 것이다. 나 역시 양손에 크레파스를 들고 대회에 참가했던 추억이 남아있다. 당시 내 또래들은 하늘을 나는 자동차, 휴대용 TV, 무인 로봇들을 그려냈다. 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유독 기억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서울시에서 대대적으로 주최한 대회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뽑힌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언뜻 보면 교과서에 나올 법한 건전한 스토리를 담았는데 식물이 자라는 걸 보며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을 네 컷 만화로 그렸다. 엄마와 아들이 사이좋게 선반 위에 화분을 바라보는 게 첫째 컷,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게 둘째 컷, 잎이 돋아났다고 어린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이 셋째 컷, 그리고 그 화분을 확대해 보인 게 마지막 컷이었다. 말풍선 하나 없는 심심한 이 그림이 왜 상을 탔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컷을 유심히 보았는데 식물 줄기 중앙에 조그마한 금속 부품이 그려져 있었다. 아.. 순간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여린 잎을 가진 식물이 기계라는 설정이었다. 어린이였던 내가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성인이 된 지금도 그 스틸컷들을 심심찮게 떠올리곤 한다. 식물이 잎을 피웠다고 해맑게 웃던 남자아이 표정은 더욱 생생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지난달 CO2를 포집하는 기계 나무를 개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물론 환경 정화를 목적으로 고안한 이 나무는 아직 어린아이의 동심을 대체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 안도해야 되는건지 이제는 그림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하는 건지 갈팡질팡한 요즘이다.




요즘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지니를 깨운다. 그는 동거인이 아니라, 나와 동거하는 음성인식 스피커다. 핸드폰을 살 때 특판으로 통신사에서 끼워준 스피커. 그런데 이 놈이 꽤 영리하다. 돈데크만과 램프의 요정을 연상케 하는 레트로한 이름으로, “지니! 지니야!” 라고 부르면 “네?” 라고 응답한다. 곧이어 나는 묻는다.

“오늘 날씨 어때?”

2초의 정적 후 대답이 들려온다.

“현재 서울 역삼동 날씨는 29도이며 오후에 비가 올 확률은 58%니 우산을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출근 준비에 돌입한 나는 음악을 듣고 싶어진다.

“쳇 베이커 음악 들려줘.”

소년과 중년의 반반을 가진 남자의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상하다.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나도, 분명 아무도 없는데 사람처럼 응대해주는 기계 너도. 원통의 형상을 한 기계와 간단하지만 대화라는 것이 오가고, 결과물로 흘러나오는 것들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출시된 정통 재즈다. 현재를 사는 내가 SF영화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소속돼있는 HR부서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AI 면접 시스템을 도입해 인턴을 뽑았다. 전통적인 사람의 영역이었던 ‘사람을 가려내는 일’을 인공지능에 맡겨본 것이다. 이 AI는 지원자의 얼굴표정, 말투, 맥박 등의 생체신호를 관찰하고, 68개 근육의 움직임으로 얼굴 표정을 감지한다. 심지어 두뇌의 전전두 피질 6곳을 감지하여 직무역량을 파악한다. 이렇게 피면접자가 회사에 적합한 인성인지 ‘객관화’한다. 개발업체는 AI가 우수 인재를 판단하는 정확도는 82% 수준이라고 자신했다. 면접자 개인의 성향과 주관이 섞인 비구조화 면접의 타당도가 50% 이하에 그친 것에 비해 월등하게 정확한 수준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 지원자 중 AI면접에서 B 이하로 기록된 피면접자들은 모두 탈락했다. 이번 인턴의 업무 평가를 토대로 계속 AI면접을 활용할지 말지는 판단하겠지만 많은 기업에서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 AI면접은 입사를 위해 거쳐야 할 또 하나의 관문이 되었고, 이에 질세라 시중에는 AI면접의 합격기술서가 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지 오류를 보완하고, 불완전성을 대체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인류의 선, (정확히는) 나의 행복에 기여하는 걸까? 물론 운전, 집안일과 같은 단순 반복적인 노동이 투입되는 일, 손보다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일, 물리적 힘의 편차를 줄여주는 일은 두 팔 벌려 환영 중이다. 이는 편리한 삶을 위해 선사시대에 불을 사용하고 빗살무늬 토기를 개발한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이 사랑, 돌봄, 위로와 같은 정서적 영역을 침범한다면 어떨까. 사람 간의 관계에서만 그리고 인간 번외의 일이라 믿었던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만이 충족될 수 있다고 믿었던 감동들 말이다. AI스피커가 외롭지 않게 말동무가 되어주고, 오로지 해의 영역이라 믿었던 초록색 잎을 띄어 성장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기계 나무처럼.


이미 숱한 문학과 영화들은 인공 지능과 과학 기술들이 침범한 인간 정서의 영역과 윤리적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소설 <숨>에서 천재 SF소설가라 불리는 테드 창이 보여준 평행자아의 세계, 모든 일화를 영상화할 수 있는 라이프로깅, 과거와 미래를 탐험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나비효과들을 간접 목도하면서, 이들이 결코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하고 말았다. 과거보다 편리해지고 기억의 오류는 줄겠지만 원시 사회보다 문명 사회의 우리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게다가 곧 실현될지도 모르는 테크놀로지들이 인간 욕망의 성급한 충족, 미래를 모르는 불안감의 일시적 해소, 실패 경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급히 활용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되었다. 간혹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인내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고 당시에는 살을 에이는 듯 아플지 모르지만 고통으로부터 성장하기도 한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겁없이 달려들 수도 있다.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는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숱한 경험으로 얻어진 굳은살에는 인생의 수만 가지 변수에도 육감을 발휘하는 ‘지혜’라는 포상이 주어지기도 한다.



신기술이 인도하는 미래 사회는 굳이 어렵게 타인과의 정서적 교류와 신뢰관계를 쌓지 않아도 섹스 로봇으로 육체적 욕망을 충족하고, 나의 평행자아로부터 위안을 받고, 즉각적으로 미래를 확인함으로써 욕망과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은 고된 것이라는 '생즉고'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나는 불안과 욕망은 새로운 탈을 쓰고 또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을 최소화하겠다고, 실수에서 오는 고통을 회피하겠다고, 비뚤어진 욕망을 타인에게 해소할 수 없다고 즉각 즉각 테크놀로지들이 활용된다면,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스스로 좀먹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막힌 테크놀로지가 찾아와도 실패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이며, 그야말로 생과 부딪쳐본 사람이 진짜일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2020 우주의 원더키디>, 1989


어린 시절 일요일 오후마다 지겹도록 방영하던 <2020 우주의 원더키디>의 2020년이 내년으로 임박했음을 알고 있는지? 아득한 미래 연도로 보였던 해가 6개월 후임을 자각하니 잠시나마 소름이 돋았다. 시대를 앞서간 빼어난 국산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만화는 유독 단조의 색체와 질감을 가진 베트맨의 고담시티처럼 암울한 폐허의 행성이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새롭게 다가올 문명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처럼 눈 가리고 경계 태세로 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들은 좋든 싫든 나의 삶에 조금씩 침투해오고 있다. 일부는 내 곁에 있는 AI스피커처럼 나의 삶을 윤택하게 이끄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도로 프로그래밍된 기계 식물을 보고도 동심을 품고, 인공지능과 진득한 육체적, 감정적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미래가 도래해도 나는 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바로 서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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