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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Aug 06. 2019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의 씀

나에게 쓰는 일이란 뭘까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중년 여인 사에키는 자신이 살아온 십수년의 일들을 매일 글로 기록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샅샅이 청진기를 들이대듯 글을 썼다. 그러나 과거를 기록하는 일은 살을 에는 것 같이 괴로운 작업이었다. 스무살에 그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연인을 잃은 그녀에게 삶의 의미는 상실 이전의 추억 속에서만 가동되어 왔다. 따라서 상실을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록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기록을 끝낸 그녀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수많은 기록의 원고를 태워 없애기를 부탁한다. 나는 그녀의 행위에 공감하게 되면서도 몇가지 질문을 던져야 했다. 사에키는 왜 써야 했고, 왜 누구도 볼 수 없게 태워야 했을까? 글이라는 것에는 타인이 읽어주길 바라는 어렴풋한 욕망이 잠입해있지 않은가. 사에키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단지 쓴다는 사실이 중요했다"라고 말한다. 이미 다 써버린 것에는 완결된 형태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문득 글을 쓰고 싶을 때 나는 사에키를 떠올린다. 글이 완성되면 타인에게 보이지 않고 태워 없애는 것이 '완성'이라 말하던 정신을.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 기반된 글쓰기가 진정으로 순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속을 털어낸 글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글인데 누군가가 읽어주고 호응해주길 바라는 모순이 있다. 이 마음은 사랑스럽다. 하지만 글보다 먼저 타인의 공감과 호응을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면 그것은 불순한 마음이 깃들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이 불순한 바람을 완전히 떨칠 수 있을까?

한때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혹은 보르헤스처럼 무(無)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비범한 스토리는 쓰지 못해도 사건, 사고를 다양한 관점의 스토리로 구성해 담담한 필체로 쓰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저널에서 소설적 기법을 가미해 사건을 쓰는 일을 '픽처 기사'라 한다.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된 지금에서는 흥미와 자극을 위해 함부로 쓰인 기사들의 영향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독자의 울림을 위한 '첨가'와 '거둬냄'으로 편집된 기사가 실화의 당사자들에게 미치는 파급력을 보면 당시에 난 가볍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사회를 향한 쓴소리를 공론화할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단지 나 자신과 나를 거쳐간 어떤 영향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즐겨 읽고 보아온 작품들이 내 안에 꾹꾹 담겨 팽창한 기분이 들 때면 이를 나의 언어로 남기고 싶다. 그렇다면 왜 그 언어가 말이 아니라 '글'이어야 할까. 일단 말을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말을 할 때 나는 어수선하고 조급하며 조금 들떠있다. 현장에서 소리가 된 메시지는 즉흥적이고 완결되는 경우가 적어 그 뒷맛이 매끄럽지 않다. 그러나 글은 현장을 한 발 빗겨나 있다. 말보다 선선하며 생각의 가지치기를 거쳐 나온다. 글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깊고 내밀한 행위다. 그렇기에 나는 글이 쓰는 사람의 성향과 내면을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라 생각한다.

다시 카프카의 사에키로 돌아가자. 그녀는 괴롭지만 기꺼이 자신이 겪은 상실을 오롯이 소화해내기 위해 글을 썼다. 하루키의 사에키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도 필요 이상으로 엄혹하고 잔인하게 과거의 회한을 글로 재현해낸다. 그들에게 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경험을 스스로 상기하여 의미를 부여해냄으로써 고통과 회한을 승화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나 역시 언젠가는 과거의 사소한 무심함이 빚어낸 관계의 파열들, 공기의 밀도까지 기억하고 싶은 찬란한 순간들, 절대로 잊고 싶은 일들이 가져다준 상흔을 글로 꺼내 내 안에서 승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는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의 글일 것이다.


글을 쓸 때 문득 생각나는 그림 <room by the sea> by Edward Hopper


이 욕망으로 앞으로도 나는 정처 없고 미숙하지만 일관되게 쓰길 원할 것이고, 그 산출물들을 확인하며 한 뼘 전진했다는 기분을 얻게 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의 글을 다 태워버린 사에키의 정신을 흠모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타성을 의식하는 유치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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