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소메리 Nov 09. 2015

할머니의 유산

어머니는 내게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고

아버지는 좋은 남자 만나 일찍 결혼해서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라고 하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했다.


엄격한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밥상부터 남녀가 따로 구별 지어야 하고, 어른들에게 함부로 말대꾸도 해선 안되고, 눈도 똑바로 마주쳐선 안되고, 손아래 동생이래도 남자에겐 존대해줘야 하고, 아침 일찍 이른 시간, 늦은 시간, 덥고 추운 날은 남의 집 방문도 삼가야 하고, 전화도 가려야 하고, 남자의 머리맡을 넘어 다녀도 안되고, 기타 등등.


모든 게 이해할 수 없는 제약들이고 고리타분한 잔소리였다.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으니 문제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잡음을 내는 반항적인 딸이었고 회초리도 불사하는 딸, 부모님에겐 어떤 기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부끄럽고 무례하고 딸의 기능을 상실한 딸이었다.


선생님이 되기엔 가르친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많았고, 일찍 결혼하기엔 세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제 갈길 가겠다며 큰소리치고 반항이나 하더니 그래도 어찌저찌 결혼이란 걸 했다. 


누군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

누군가의 엄마로 산다는 것.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했다.22


역시 무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거대한 포구(자유로운 항해를 기대했지만, 역시 나를 단단히 고정시켜 정박해 놓는 항구) 았다.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허공을 바라보면 깊은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채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집 안에서 가장 월권이 강하고 남성 우월을 매섭도록 지켜 오시던 할머니, 완벽하고 깔끔하고 완고하시더니 치매가 왔고, 몇 년을 고생하시다가  어느 봄날,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 늘 앙금을 품었던 할머니였는데 미움이 사라졌다. 죽음이란 거대한 신 앞에선 그 무엇도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완고하게 지켜오신 고집도 죽음이라는 숙명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왜 알지 못했을까.


할머니 장례식 후, 인생의 목적이 반항이었는데. 이젠 무엇과 투쟁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죽음보다는 삶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이고 모험인 건지. 그토록 완벽하던 할머니가 두려워하던 게 무엇인지 조금 느낄만한 나이가 되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우신 적이 없으셨다.

아들, 손주, 손녀, 며느리, 집안 대소사가 먼저였고.  당신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정화수 놓고 기도를 올리시면서, 당신을 위한 기도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렇게 사셨으니 손녀인 내게도 그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거였다. 날 괴롭게 하려고 일부러 그리하신 게 아니라. 


그러니 딸도 엄마도 아닌 그냥 나로 살면 되는 일이었다.

거창할 것도 엄청난 용기도 필요하지도 않는 단순한 삶이면 그만이었다. 

단 한 번도 그럴 순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게 갑갑했던 모양이다.


누군가는 자기애라 하고, 자기 집착이라고 할 테지만, 반항을 버리고 살아보고 싶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타랫줄과 울타리를 넘는 시선을 감히 무시하고 싶다. 

주어가 타인이 아닌 내가 되는 것뿐이다. 

부모님을 위한 선택, 가족을 위한 선택이 아닌, 능동적인 자의적인 결정에 의한 선택, 그것이면 족하다.

그 정도라고 해도 이기적인 삶이 되기에 충분할테고. 







키가 170cm가 넘으셨던 1924년생 할머니는 어린 눈에는 늘 무섭고 크신 존재셨다. 감히 누구도 함부로 대적하지 못하는 존재. 타향에서 6남매를 키우시며 한평생 반듯하게 지켜온 유교정신은 이제 연대가 끊어졌다. 철저하게 지키고 구속당할수록 숨이 막혀오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늘 집을 비우신 자유로운 할아버지 대신, 엄격함으로 자식을 키워내셨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말씀대로 온 세상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실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애니어그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