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에.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더는 엄마 혼자서 할머니를 돌볼 수 없을 만큼, 할머니의 치매 증세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증세가 그리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엄마는 할머니를 입원시킬 수 없다며 버텨왔다. 장녀로서의 책임감, 아빠와 이혼한 뒤 두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왔던 지난날에 대한 부채감, 나와 동생을 키워준 할머니에게 느끼는 깊은 감사, 여자 대 여자로서 할머니에게 느꼈을 진한 연민. 숱한 감정들이 엄마를 옥죄고 있었다. 주변에서 모두가 할머니를 그만 입원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 감정들에 짓눌려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런 엄마가 정말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아마 엄마는, 엄마의 뼈와 살을 깎는 심정으로 그 결정을 했을 것이다.
엄마의 결정이 반가웠다면, 나는 나쁜 손녀일까. 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면서, 할머니가 꿰매준 이불을 덮고, 할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할머니가 쓸어준 방에서 잠을 잤으면서. 할머니를 보내겠다는 결정에 '드디어 엄마가 할머니의 간병에서 벗어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정말 나쁜 인간일까.
아침에 할머니를 입원시켰다는 엄마의 문자를 받고 나는 나대로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엄마에게 엄마는 할 만큼 했다고, 절대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말라고, 이 모든 게 할머니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 말도 진심이었고, 내 안에서 피어난 나의 죄책감도 진심이었다.
아마 우리 외가 식구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삼촌들은 삼촌들대로, 이모는 이모대로, 사촌들은 사촌들대로. 모두 저마다의 죄책감과 싸워야 했던 하루였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 모두가 느낀, 각자의 죄책감은 할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에서 왔다. 깊고 넓은 할머니의 사랑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죄책감은 꽤 실한 열매를 맺은 셈이다. 이 열매가 떨어지고, 가지가 꺾이고, 끝내 뿌리가 삯아들기까지 우리 모두는 오랜 시간 각자의 아픔을 견뎌야 할 것이다.
모두 다 가장 오래, 가장 많이 고생한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의 마음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는 하루였다. 그리하여 각자의 죄책감 따위는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저마다의 슬픔을 삯이고 숨기며 보낸 아픈 하루.
집을 떠나 첫밤을 보낼 할머니가 염려되지만, 할머니는 안전한 곳에 잘 계시니 할머니 걱정은 좀 내려놓고 싶다. 내가 내려놓아야 엄마를 진짜로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할머니는 우리 식구들 모두에게 가장 깊고 진한 사랑을 주신 분이니, 이 또한 이해해 주시리라 무턱대고 믿어본다.
할머니가 없는 집에서 혼자 뒤척일 엄마를 비롯해
각자의 공간에서 저마다의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쉬이 잠들지 못할 우리 식구들 모두가
너무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할머니, 잘 자요.
엄마도 잘 자요.
우리 모두 잘 자요.
죄책감은 이 밤의 짙은 어둠 속에 잠시 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