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을 좋아하는구나, 확신했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친한 언니와 동생을 만나고 돌아오던 늦은 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달이 너무나 선명하고 밝았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파랑을 많이도 나누었다. 나누고 나누어 집채만 하던 파랑이 모래알처럼 부서졌던 날. 그 만남은 무척이나 귀하고 애틋했는데, 그래서인지 헤어지는 시간이 말할 수 없이 아쉬웠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문득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자 모든 게 괜찮게 느껴졌다. 그들에게서 멀어져 나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뒤를 쫓던 달빛. 내가 보는 저 달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고 그곳에서도 볼 수 있구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온몸으로 와닿았다. 내가 보는 달을 너도 본다. 그게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매일 함께 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을 바라볼 때, 나도 같은 달을 본다면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진한 위로였다. 달빛을 닮은 노랑의 위로. 그날의 감각이 너무나 선명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숙하지만 시를 한 편 썼다.
위안
달을 보면 안심이 된다.
내가 보는 달을 너도 보고
네가 보는 달을 나도 본다
내가 담는 달을 너도 담고
네가 담는 달을 나도 담는다
너와 나는 함께가 아니지만
너와 나는 달 아래 함께다
너와 나는 우리가 아니지만
너와 나는 달 앞에 우리다
우리가 보고 담는 달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나다
다르지 않다
그 뒤로 매일 달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둠을 환히 밝히는 달빛은 눈부시지 않지만 깊고 짙었다.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햇빛과 달리 밤새 바라보고 있어도 좋은 달빛. 깜깜한 하늘에 유일무이한 큰 빛이나 스스로를 뽐내지 않는 달빛. 반짝이지 않고 쨍하지 않아도 제 몫의 빛을 풍기고 달무리를 드리우는 달빛. 언제 어디서든 하늘을 올려다보는 작은 수고로 큰 위안을 주는 달빛. 나는 그런 달빛을 사랑한다.
퇴근길이면 달의 자리를 찾아 몸을 튼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을 보기 위해 바라봐야 하는 방향은 다르지만, 달은 늘 예측 가능한 자리에 있다. 아직 날이 훤한 여름날에는 윤곽만, 해가 빨리 지는 겨울날에는 더욱 선명한 명도로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뽐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날이 흐려 달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잿빛 구름 뒤에 달빛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밤하늘이 회색빛일리 없으니. 저 구름 뒤에 은은한 달빛이 있어, 검은 밤이 아니라 회색 밤일 테니.
처음 달을 사랑하게 된 것은 달빛의 은은한 그림자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안정감 때문이었는데, 매일 달을 좇다 보니 달의 모양이 매일 다른 것도 사랑의 이유가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매일이 그저 그런 하루의 반복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다른 날이라는 것 같아서. 조금씩 차오르는 달을 보며 나도 어제보다는 깊은 내가 되었기를, 가득 차면 다시 비워지는 달을 보며 나도 넘치게 과하지는 않기를 다짐하게 된다. 달이 차고 비워지는 시간 동안 나도 차고 비워지길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어제보다 조금 나은 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어제보다 조금 가벼워진 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달과 함께 나아지고 나아가는 날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매일 볼 수 있는 달빛을 사랑한다는 건, 달빛이 나의 노랑이라는 건, 희망이 된다. 하루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을 바라보는 마음.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냈음을 확인하는 시간. 나의 파랑을 잘 돌보아 무너지지 않고 달빛을 마주했다는 안도감을 만끽하는 순간. 이토록 노랑빛인.
달을 사랑하지만 어디다 말한 적은 없었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노랑으로 남겨두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매일 뜨고 지는 달을 보면서 이토록 호들갑이 되는 마음을 공감해 줄 이도 없을 것 같았기에. 그런데 얼마 전 고3 아이들이 치른 모의고사 지문에서 이 시를 만났다. (세상에, 이런 시를 모의고사 지문으로 만나다니. 이렇게라도 만났으니, 이 또한 노랑으로 여겨야겠지.) 그리고 나는 (아이들 몰래) 조금 울었다.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꼭 한 사람은 더 있는 것 같아서.
달빛 체질(이수익)
내 조상은 뜨겁고 부신
태양 체질이 아니었다. 내 조상은
뒤안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달의 숭배자였다.
그는 달빛 그림자를 밟고 뛰어놀았으며
밝은 달빛 머리에 받아 글을 읽고
자라서는, 먼 장터에서
달빛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낮은
이 포근한 그리움
이 크나큰 기쁨과 만나는
힘겨운 과정일 뿐이었다.
일생이 달의 자장(磁場) 속에
갇히기를 원했던 내 조상의 달빛 체질은
지금
내 몸 안에 피가 되어 돌고 있다.
밤하늘 떠오르는 달만 보면
왠지 가슴이 멍해져서
끝없이 야행(夜行)의 길을 더듬고 싶은 나는
아, 그것은 모체의 태반처럼 멀리서도
나를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이 바닷물을 끌듯이.
달빛이 나를 얼마나 강한 인력으로 이끄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나를 이끄는 빛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 포근한 그리움/이 크나큰 기쁨과 만나는/힘겨운 과정일 뿐‘인 ‘낮’의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맞이하는 ’달빛‘의 시간. 나도 이 시의 화자처럼 ’밤하늘 떠오르는 달만 보면/왠지 가슴이 멍해져서/끝없이 야행의 길을 더듬고 싶-‘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마음으로, 저 달빛을 길잡이 삼아 걷고 또 걷고 싶다. 달빛 그림자를 한 걸음, 한 걸음 귀히 밟으며.
요즘 나는 많은 것을 잃는 중이다. ‘잃는‘ 행위에 진행형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잃을지 알 수 없어서 진행형으로 쓸 수밖에 없는 날들을 살아내고 있다. 너무 슬퍼서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날들. 파랑의 날들. 어쩌면 나는 더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더 오래 파랑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냥 겁나지 않는 이유는, 내일도 달은 그 자리에서 제 빛을 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달을 올려다보며, 나와 함께 저 달을 바라보는 마음들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